〈오렌지로드 극장판〉-'그날로 돌아가고 싶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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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세대 매니아들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듯 하지만 〈란마1/2〉의 작가로 유명한 타카하시 유미코의 〈메존일각〉 (국내출간 만화제목:도레미 하우스)와 함께 80년대를 대표하는 양대 청춘 애니메이션물로 꼽히는 87년 4월부터 88년 3월까지 니혼테레비에서 방영된 〈키마구레 오렌지로드〉(국내출간 만화명:변덕쟁이 오렌지로드)는 '마츠모토 이즈미'의 만화 원작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든 것이다.

맨처음 단편 30분짜리 OVA로 시작해서, TV시리즈, 극장판, 다시 OAV라는 수순을 밟은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작품으로 제일 처음 나온 섬 여행에서의 에피소드만을 가지고 만든 OAV는 성우도 제작진도 이후의 작품들과 다르기 때문에 이후의 작품들과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점을 많이 느끼게 한다.

이후 원작만화의 인기를 업고 제작된 총 48화 분량의 TV 시리즈와 시리즈 완결편이라 할 수 있는 극장판, 89년에서 90년까지 외전격으로 제작되어진 총 8편의 OAV와 1편의 뮤직비디오가 제작되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작품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1988년도에 상영된 오렌지로드 극장판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로 몇 가지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어 한번 주목해 볼만한 작품이다.

키마구레 오렌지 로드는 초능력을 가진 일가의 장남 '카스카 기요스케'라는 소년이 어느 마을에 이사해와서 친자매나 다름없이 지내는 '아유카와 마도카'와 '히노야마 히카루'의 두 여자와 삼각 관계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그린 청춘 코믹물이다. (주인공은 초능력으로 악당을 물리치거나 외께 침략자들과 싸우는 영웅이 절대 아니다. 단지 초능력을 가진 보통사람(?)이다.)

카스카는 마도카와 서로 좋아하는 사이지만 여러 가지 사건이 겹쳐지면서 표면적으로는 히카루의 애인으로 공인되어 버린 관계. 물론 히카루는 그런 사정을 모르고 카스카가 진정으로 자기를 좋아하고 있다고 믿고있고, 카스카는 유유부단한 성격 탓에 그 상황을 타파하지 못하며, 아유카와는 히카루와의 우정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어 버려 줄곧 긴장 상황을 유지해 나간다.

만화 원작에서는 모든 사실을 안 히카루가 카스카와 마도카를 연결해 주지만, TV판에서는 결국 사랑의 행방이 완전히 결판나지 않은 상태에서 끝나게 된다. 그리고 그 결말을 보여주기 위해 나온 것이 바로 극장판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이다. 극장판에서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카스카가 히카루와 완전히 정리를 하고 마도카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서로의 감정을 정리해가게 되는 것으로 삼각 관계에 종지부를 찍게된다.

오리지날 스토리와 드라마적 기법이 상당히 많이 쓰여져서 기존의 오렌지로드 작품들과는 상당한 차별성을 보여주는 이 극장판은 오렌지로드 팬 사이에서도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우선은 이 작품의 분위기가 다른 작품들과 달리 굉장히 무거우며 사건 전개의 초점도 거의 대부분이 카스카와 히카루의 감정흐름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이 다르다. 또한 카스카는 영화 내내 유일한 그의 장점이랄 수 있는 초능력을 한번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아유카와의 히카루에 대한 감정도 보다 차가운 입장에서 표현되어 지고 있다. 히카루는 오래 전부터 카스카와 마도카와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었으며, 결별 선언을 당하고 난 후에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카스카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노력한다.

원작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다른 결말에 적응하기 힘든 감이 있지만, 다시 한번 찬찬히 감상해 보면 그리 나쁘지 않은 전개와 결말이다.
원작 만화의 결말은 뭐랄까 약간 동화적인 결말로서 세 사람은 별다른 갈등 없이 결말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모든 사람의 관계도 깨끗이 정리가 된다. 하지만 극장판의 결말은 실제로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을 전제로 삼고 있다. 그래서 세명은 서로간에 격게되는 갈등으로 결말을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서로간의 감정의 앙금은 작품이 끝난 뒤에도 계속 남아있다가 1996년 상영된 신오렌지로드 극장판에 가서야 겨우 해소된다.

원작과 가장 달라진 극장판의 히카루의 태도는 한 남자를 사랑하고 그만을 바라보며 살아온 여자가 갖는 당연한 감정이며, 아유카와에 대한 태도 역시 친자매처럼 지내던 사람에 대한 당연한 태도라 하겠다.

히카루에 대한 카스카와 마도카의 태도 역시 더 이상 소년·소녀일 수 없어 어른이 되어버린 그 둘에게 있어서는 어쩔 수 없이 걸어가야 하는 길이였다. 등장 인물들은 성장하고 감정의 골은 더욱 깊어져 어느새 모두 더 이상 서로 마냥 좋은 관계로만 있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둘은 히카루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면서도 자신에게 주어진 가장 올바른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카스카가 그의 진심을 보이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초능력을 사용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사람이 진심을 보일 때 필요한 것은 그의 정성이지 특수한 기술이 아닌 것이다.

그럼 굳이 키마구레 오렌지로드가 아닌 전혀 별개의 작품으로 만들었으면 되지 않느냐라는 의견도 있을 터이지만 이 작품은 오렌지로드가 가지고 있는 원작의 배경 때문에 그 가치가 더욱 살아나는 작품이다.
우선은 원작이 보여주는 세 사람의 입장과 감정들이 있기 때문에 관객은 그들 사이의 관계를 이미 이해하고 작품에 임하고, 그들이 극장판 안에서 가지는 감정을 별 다른 설명 없어도 받아들일 수 있으며, 극장판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아픔과 그 극복 과정에 동참하고 동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원작을 보지 않고 극장판을 보게된다면 정말로 아무 가치 없는 삼류 신파극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원작에서 보여준 세 사람의 우정과 관계가 있기에 비록 분위기와 내용이 원작과 많이 틀리지만 '키마구레 오렌지로드 극장판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는 인간의 성장 과정과 청춘을 그린 훌륭한 작품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아울러 이들이 어른이 되어 보여주는 신오렌지로드 극장판을 함께 감상한다면 더욱 더 깊은 감명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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