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가 밝히는〈허준〉의 인기 비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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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가에 사극 바람이 거세다.

MBC 월화드라마 〈허준〉 이 50%를 웃도는 기록적인 시청률을 지키고 있고, KBS가 2년여 준비 끝에 내놓은 〈태조 왕건〉도 지난 주말 첫 방송에서 29.4%(TNS미디어코리아 조사)의 높은 시청률을 보여 〈용의 눈물〉〈왕과 비〉 의 인기를 이을 조짐이다.

1990년대 들어 침체를 거듭한 사극이 제2의 전성기를 맞은 것일까. 〈허준〉의 연출자 이병훈PD는 "한때는 드라마라면 한 번 보기 시작하면 계속 봐주는 줄 알았지만, 오늘 하루 재미 없으면 내일부터 안보는 게 요즘 시청자" 라면서 낙관적인 전망을 부정한다. 이 PD는 70년 MBC에 입사, 20여년 동안 〈암행어사〉〈조선왕조5백년〉 시리즈 등을 만들어온 사극 전문가.

그런 그가 〈조선왕조5백년-대원군〉 이후 8년여만에 야심 차게 부활시킨 왕실 사극 〈대왕의 길〉이 초반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시청자의 눈길을 사로잡는 데 실패한 것이 겨우 2년 전. 〈대왕의 길〉과〈허준〉은 어떤 점에서 다를까. 밤샘촬영을 마치고 피곤한 몸으로도 사극에 대한 열변을 토한 이병훈PD는 "젊은 시청자를 잡기 위해 '사극 같지 않은 사극' 을 만들려고 한 게 주효했다" 면서 성공비결을 분석해 들어갔다.

▶사극 같지 않은 사극을 만들자〓우선 소재 면에서 편년체로 서술된 사료에 살을 붙여가는 방식으로는 힘들다고 봤다.

현대극처럼 작가의 상상력이 폭넓게 발휘될 수 있는 소재를 찾았고, 사극 집필 경험은 없지만 〈종합병원〉등 현대극에서 좋은 기량을 보여준 최완규씨에게 극본을 맡겼다.

음악도 여러 개의 시안 중에 사극으로는 파격적인 뉴에이지풍을 골랐다. 겁도 났지만 드라마국 김지일국장이 "기왕 파격으로 가는 거, 한번 해보자" 고 힘을 줬다. 의상도 서민 사극의 주조인 흰색.흑색.갈색으로는 힘들다고 봤다. 디자인은 고증을 따르되, 색채는 파스텔톤을 입혀 칙칙한 이미지를 벗게했다. 서민 가정의 흙벽도 과거보다 채도를 한층 밝게 조절했다. 무엇보다 극의 전개속도를 빠르게 했다.

초반에는 한 회에 서너가지 사건, 2년여의 세월을 압축해 담았을 정도다. 대사 역시 좀 늘어진다 싶으면 촬영 후에라도 편집과정에서 과감하게 잘라낸다.〈태조 왕건〉도 잠깐 보니까 대사치는 속도가 무섭게 빠르더라.

▶신분상승의 성공담을 골라라〓사극 소재로 가장 성공하기 힘든 대목이 구한말이다. 일제 침략, 개화파의 실패 등 시청자가 스트레스를 받을 요소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대원군이 있지만 예전에 해보니까 권력의 정점에 이르는 대목까지만 시청률이 좋았다. 우리 사극에서 가장 즐겨 다루는 세조.연산군 시대도 단종이나 폐비 윤씨의 사연이 주는 비장미와 세조의 권력찬탈, 연산군의 복수 등 성공담이 조화를 이룬다.

이성계나 왕건의 개국은 대표적 성공담이다. 서얼출신의 중인신분에서 정1품까지 오른 허준은 IMF이후 시청자들에게 통쾌함을 주기 딱 좋은 소재다. 의인을 갈망하는 시대 분위기와도 연관짓지만 의인이 계속 좌절하는 줄거리라면 인기 끌기 힘든다. 너무 영웅주의적이라는 비판도 있으나 허준은 조선시대 역사상 서얼 출신으로 정1품에 오른 두 명 중 하나이고 무려 일곱 권의 저술을 남긴 영웅임에 틀림없다.

▶사극의 전성기가 다시 올까〓우리 사극의 전성기는 KBS〈풍운〉을 시작으로〈조선왕조 5백년〉시리즈 등 정사 중심의 사극이 연달아 제작된 80년대다.

여기에는 방송의 계도적 기능을 강조한 신군부정권의 영향이 컸다. 선정성.폭력성에 대한 비판이 몰아쳐도 사극의 독특한 표현 양식은 이를 피해갈 수 있었다.

세조의 왕위 찬탈 과정을 다룬 제3화〈조선왕조5백년-설중매〉편을 신군부 고위층이 관심있게 봤다는 얘기도 들려왔다. 반대로 일반시청자들은 단종의 입장이었다.

현대극에서는 감히 다룰 수 없었던 군부쿠데타에 대한 비유로 본 것이다. 90년대 들어 사극의 그런 카타르시스는 거의 없어졌다. 젊은 시청자들은 '치마 저고리만 나와도 채널 돌린다' 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허준〉의 성공은 '치마 저고리가 나와도 재미있을 수 있다' 는 걸 이들에게 보여줬을 뿐이다.

▶좋은 사극이 나오려면〓역사학자나 문학 작가들이 우리 역사 속에서 허준 같은 인물을 발굴해야 한다.

지금도 많은 시청자들이 91년 방송한 이은성 원작〈동의보감〉과 비교한다. 미천한 신분이었던 허준에 대한 기록은 정사에는 몇 줄 되지 않는다. 그런 인물에 작가적 상상력을 입혀내는 작업이 많아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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