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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대현의 ‘마음아 아프지마’ ] 방바닥에서 일어나시죠, ‘건어물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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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면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신경정신과 교수

얼마 전 ‘마음아 아프지마’ 독자로부터 칼럼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e-메일을 받았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던가. 메일 한 통에 나의 ‘주관적 안녕감(subjective well-being)’ 지수가 부쩍 올라갔다. 심리학적으로 보면 칼럼 쓰는 행동에 대한 ‘긍정적 강화’가 일어난 셈이다. 이 독자는 칼럼 소재도 하나 보냈다. “요즘 들어 ‘건어물녀’처럼 살고 있어요. 주말엔 집에서 ‘시체놀이’를 하고요. 밖에 나가 몸을 움직이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걸 알긴 하는데… 정작 주말이 되면 귀찮아집니다. 저 같은 사람이 의외로 많던데 왜 그럴까요.”

 건어물녀는 일본 만화 ‘호타루의 빛’에서 유래한 표현이다. 직장에선 세련되고 능력 있는 여성이지만, 일이 끝나면 데이트 대신 집으로 직행하는 부류다. 집에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머리를 대충 묶고, 맥주와 건어물을 즐겨 먹는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시체놀이(시체처럼 가만히 누워 있는다는 뜻)가 이들의 취미다. 서양에도 비슷한 유형이 있다. 바로 ‘카우치 포테이토 (couch-potato)’다. 종일 소파에 앉아 감자칩을 먹으며 TV만 보는 사람을 일컫는 말인데, 요즘엔 한 단계 진화해 인터넷 서핑에만 몰두하는 ‘마우스 포테이토’가 등장하기도 했다.

 스트레스 문제로 클리닉을 찾아온 분들에게 ‘주말을 어떻게 보내느냐’고 물으면 건어물녀, 시체놀이, 카우치 포테이토를 뒤섞어 놓은 생활을 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한 인터넷 쇼핑몰의 30대 여성 대표가 이런 경우다. “멍하니 누워 TV만 봐요. 사람들과의 만남에 지쳐서 그런가 봐요. 고객에게 지쳤고, 직원들에게도 지쳤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아요.”

 심리학적 관점에서 건어물녀, 시체놀이, 카우치 포테이토는 ‘회피’ 행동이다. 대인관계, 과중한 업무, 속상한 사건·감정 등에서 자신을 보호하려는 심리적 방어전술이란 얘기다. 단기적인 회피 행동은 우울한 기분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된다. 스트레스를 주는 요인으로부터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길어지면 얘기가 다르다. 행복 계기판의 눈금, 즉 주관적 안녕감 지수를 바닥으로 떨어뜨려 우리를 더 불행하게 만든다. 이들 스트레스 요인이 동시에 우리에게 행복을 주는 요소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행복한 일이다. 하지만 너무 지나쳐 집착이 되면 스트레스가 된다. 그럼 사랑을 하지 않으면 되는 걸까? 이런 장기간의 회피 행동은 행복을 주는 요소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행동하지 않으면 그 행동이 주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 이처럼 긍정적 강화가 없으면 회피 행동이 장기간 고착되기 쉽다.

 사람의 행복감을 반영하는 주관적 안녕감 지수가 장수·성공 등에 직접적 영향을 미친다는 게 최근의 연구 결과다. 성공한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사람이 성공하고 장수한다는 뜻이다. 주관적 안녕감에 영향을 주는 요소에는 유전·환경·행동 요인이 있다. 유전적 요인이 50%, 환경적 요인이 10% 정도를 차지한다. 나머지 40%는 우리가 하기 나름인 행동 요인이 결정한다. 좋은 집에 살고, 비싼 차를 타는 것 같은 환경적 요인이 우리의 행복감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밖에 안 된다는 얘기다. 그나마 환경적 요인엔 내성이 생기기도 쉽다니 기가 막히는 노릇이다. 유전적 요인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결국 행복해지려면 40%의 행동 요인, 즉 ‘잘 노는 것’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얘기다.

 건어물녀와 카우치 포테이토들에게 주말에 친구도 만나고, 운동 같은 취미활동도 해보라고 권하면 대부분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고 답한다. 할 마음이 생겨야 행동이 뒤따르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거꾸로 행동이 마음을 바꿔놓기도 한다. 이를 ‘행동 강화(behavioral activation)’라고 한다. 우울증 환자에게 주로 쓰이던 치료법인데, 최근엔 보통 사람들의 행복감을 높이는 데에도 사용된다. 스트레스를 안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회피 행동이 점점 일반화되고 있어서다.

 오늘 잘 놀아야 내일 다시 잘 놀 수 있다는 게 최근 의학 연구의 결과다. “친구가 죽으면 오전엔 장례식장에서 진심으로 애도하고, 오후엔 다른 친구를 만나 크게 떠들며 즐긴다.” 한 75세 여성이 들려준 얘기에 답이 있다. 사람들과 함께 섞이고, 떠들고, 노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고통은 행복의 단면일 뿐이다. 고통이 두렵다고 행복을 떠나 숨어 사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강남센터 신경정신과 교수

※ 스트레스로 인한 고민을 e-메일(dhyoon@snuh.org)로 보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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