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헌의 ‘골프 비빔밥’ <27> 노력한 만큼만 기대하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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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19면


라운드를 하다 보면 2~3차례 결정적 순간이 찾아온다. 20년 동안 1000번이 넘는 라운드를 했지만 그저 그런 밋밋한 라운드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늘 고비가 있었고, 찬스도 찾아왔다. 그 결정적 순간은 그날의 승패를 가늠하는 하나의 선택일 수도 있고, 스코어의 분수령이 되는 어떤 샷일 수도 있다. 이 고비를 잘 넘으면 폼 나게 캐디 피도 내고 어쩌면 막걸리도 한잔 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남이 내 돈으로 캐디 피에 웃돈까지 얹어주며 생색 내는 꼴을 지켜봐야 한다.

사실 돈이 문제가 아니고, 스코어 한두 타가 문제가 아니다. 자존심과 체면의 문제다. 결정적 그 순간에 평소에 교회를 잘 가지도 않으면서 주님이 떠오르기도 하고, 염치불구하고 천지신명의 가호를 바라기도 한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그 절체절명의 순간. 정말 붙들고, 믿어야 하는 것은 뭘까. 평소 신심이 풍성한 사람이 부처님이든, 하느님이든 애원하고 매달리는 건 나쁘지 않다. 평소에 공덕을 많이 쌓은 사람이 ‘뭐 그리 험한 꼴이 있겠어’라는 믿음으로 샷을 하는 것이야 오히려 권할 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이라면 그 순간 도대체 뭘 믿고 의지해야 하는 것일까.

요행이나 운? 나보다 더한 동반자의 실수? 에라, 모르겠다 식의 자포자기? 이것도 아니면 우연?

근거가 무엇이든 부정적인 마음보다는 긍정적인 마음가짐이 백번 좋은 것이지만 ‘헛된 희망’은 더 큰 ‘좌절감’으로 돌아온다는 사실 또한 다들 알고 있는 삶의 지혜 아닌가. 그렇다면 뭘 믿어야 하나. 결국 자신의 연습을 믿을 수밖에 없다.

마음골프학교 학생들과 필드에 나가면 매 샷 따라다니면서 연습의 양과 질을 믿으라고 끊임없이 세뇌를 시킨다. 연습할 때 내가 보내는 거리와 방향, 탄도와 볼의 산포도 외에는 믿을 것이 없다는 걸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연습한 것보다 더 잘 될 것을 믿는 것은 도둑 심보다. 연습보다 조금 덜 될 거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연습은 없이 라운드만 많이 하고 있다면? 라운드의 경험치를 믿으면 된다. 평소에 연습을 잘 안 하고 있다면? 잘 안 될 거라고 느긋하게 생각하면 된다.

믿음에 관한 이런 이야기의 요체는 매 순간의 샷이라는 것이 인과응보(因果應報)고 사필귀정(事必歸正)이 아니겠느냐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다. 그러니 제발 우물쭈물, 오락가락하지 말고 마음을 툭 내려놓자는 얘기를 하고자 하는 것이다. 골프는 노력한 것만큼 기대하고, 그 결과를 겸허하게 수용하는 마음을 훈련하는 게임이다. 다시 말하면 ‘마음 내려놓기’를 연습하는 게임이다.

혹여 몇 번의 샷이 연습한 것만큼 안 된다고 투덜거리는 사람도 있다. 그런 학생들에게는 오래도록 골프를 해보니 18홀을 다 돌고 나면 ‘연습보다 잘 된 행운’과 ‘연습보다 잘 안 된 불운’의 숫자는 늘 같더라는 얘기를 해준다. 우리들 삶이 그러하듯 그 또한 믿어야 하는 거라고.

김헌 음골프학교(www.maumgolf.co.kr)에서 김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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