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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돈의 G2…2008년 금융위기 극복했던 원자바오·가이트너 길을 잃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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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눈 멍든 1달러 조지 워싱턴 ‘위대한 미국의 강등’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 최신호(8월 15일자) 표지. 1달러 지폐에 그려진 조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눈에 멍이 든 그림을 실어 신용등급이 하락한 미국의 위상을 꼬집었다. ‘위대한 미국의 강등(The Great American Downgrade)’이라는 커버 스토리는 부채 위기가 미국의 위상을 실추시켰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만 해도 G2(미국·중국)는 호흡이 척척 맞았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사태로 미국이 비틀거리자 중국이 ‘구원투수’로 나섰다. 4조 위안(약 800조원)짜리 통 큰 부양책을 선뜻 내놨다.

3년 만에 G2는 새로운 도전 앞에 섰다. 미국 신용등급 강등이 기폭제였다. 눈덩이 빚 앞에 미국·유럽은 앞다퉈 재정긴축에 나설 수밖에 없는 처지다. 1937년엔 반짝 경기회복이 부른 섣부른 금융긴축이 세계경제를 ‘더블딥(반짝 회복 후 더 깊은 침체)’으로 몰아갔다. 이번엔 ‘재정긴축 도미노’가 다시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세계는 다시 G2에 길을 묻고 있다.

그러나 이번엔 중국도 ‘제 코가 석자’다. ‘트리플 A’ 지위를 잃은 미국의 리더십도 예전 같지 않다. 길 잃은 G2, 세계 경제의 불안도 덩달아 깊어지고 있다.

건강 안 좋은 원자바오

이제 세계의 눈은 중국으로 쏠리고 있다. 3년 전 ‘리먼 사태’ 때처럼 중국이 세계 경제의 안전판 역할을 해 줄 수 있을까. 그러나 중난하이(中南海·중국 정치지도자 거주 지역)의 사정은 그리 넉넉지 않다. 경제정책을 총괄해 온 원자바오(溫家寶·온가보·사진) 총리는 지난달 중순 11일간 병상에 누웠던 사실을 스스로 고백할 정도로 건강이 안 좋은 상태다. 게다가 원저우(溫州)에서 터진 고속철 인재(人災) 이후 중국 지도자들의 인기와 신뢰도가 떨어졌다. 사태 해결을 위해 치고 나올 리더십에 구멍이 생겼다는 얘기다.

 2008년 위기 때는 달랐다. 중국은 당시 통 큰 경기부양책으로 세계 경제 회복에 큰 역할을 했다. 국내총생산(GDP)의 약 17%에 달하는 4조 위안(약 800조원)을 쏟아부었다. 은행 창구에서도 2009년, 2010년 약 16조 위안이 풀렸다. 중국 경제는 급속히 살아났고 세계 경제 회복에 크게 기여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우선 적절히 쓸 카드가 없다. 당시 뿌렸던 인민폐(人民幣)는 지금 ‘악성 인플레’가 돼 중국 경제를 괴롭히고 있다. 중국인민은행(중앙은행)이 수차례 금리를 올렸지만 고삐 풀린 물가는 좀체 잡히지 않는다. 지난달 물가상승률은 6.4%, 중국 시민들의 원성을 자아낼 정도다. 초강경 대책을 쏟아냈지만 부동산시장은 불안하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지방정부의 숨겨진 부채도 잠재적 폭탄이다. ‘내 코가 석 자’인 셈이다.

 서방의 요구대로 중국이 구원투수로 나서기 위해서는 또다시 내수부양 정책을 실시해야 한다.

대표적인 정책 수단은 금리 인하, 그리고 위안(元)화 평가절상이다. 이는 인플레를 더 부추길 뿐이다. 경기부양책에 따른 부작용을 잘 알고 있는 중국이 쉽게 손을 뻗기 어려울 것이라는 얘기다.

 물론 중국이 백기사로 나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중국은 현재 약 1조1600억 달러의 미국 국채를 갖고 있다. 위기의 심화는 중국에 부메랑이 돼 돌아올 뿐이다. SK차이나 경영경제연구소 왕윤종 소장은 “중국이 거시경제 정책 수단을 동원하면서까지 구원투수로 나설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면서도 “소방수 역할을 할 경우라도 미국 주도의 국제금융체제 개혁을 비롯한 대가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미국은 중국에 ‘1987년의 일본’처럼 세계 경제 회복을 위해 금리를 낮추고 돈을 풀라고 요구하지만 중국은 오히려 당시 일본을 반면교사로 활용하고 있다. 당시 일본은 서방의 기대로 내수가 조금 늘어나긴 했다. 하지만 풀린 돈은 자산거품(부동산+주식)으로 이어졌고,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으로 진입하게 됐다. 중국의 지친 리더십이 서방의 요구대로 선뜻 구원투수로 나서지 못하는 이유다.

베이징=장세정 특파원

말발 안 먹히는 가이트너

티머시 가이트너(Timothy Geithner·사진) 미국 재무장관이 유임됐다.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은 7일(현지시간) “버락 오바마(Barack Obama) 대통령이 가이트너 재무장관에게 현직을 계속 수행해줄 것을 요청했고 가이트너 장관이 이를 수용했다”고 밝혔다.

 가이트너는 애초 정부 부채한도 협상이 마무리되면 정부를 떠날 작정이었다. 그러나 여야 대립 끝에 타결된 합의안이 국제금융가의 기대에 못 미쳤고 이로 인해 미국 국가신용등급이 강등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공화당 강경파가 신용등급 강등의 책임을 물어 그의 경질을 요구하고 나선 것도 되레 그의 유임을 굳히는 계기가 됐다. 오바마로선 가이트너의 경질이 경제 실정을 자인하는 꼴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가이트너는 줄곧 오바마 정부의 ‘대책반장’ 역할을 맡아 왔다. 2008년 3월 미국 투자은행 베어스턴스 파산을 시작으로 불거진 금융위기 당시 그는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로 구제금융을 진두지휘하는 수완을 발휘했다. 오바마가 취임하자마자 그를 재무장관에 발탁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7870억 달러 규모의 오바마 정부 경기부양책의 밑그림을 그린 것부터 시작해 이번 부채한도 협상까지 야전사령관 역할을 맡았다.

 오바마가 가이트너를 버릴 수 없게 된 건 이 때문이다. 마땅한 대안도 없었다.

 그러나 ‘가이트너 카드’가 2008년만큼 먹힐지는 미지수다. 그는 이미 공화당 강경파의 표적이 됐다. 국제사회에서도 그의 말발은 예전만 못할 수밖에 없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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