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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일본 기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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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오영환
외교안보 데스크

일본 외무성의 복도는 어두컴컴했다. 브리핑 룸에선 부채를 들어야 했다. 3·11 동일본 대지진 피해지인 이와테(岩手) 현청·센다이(仙臺) 시청도 마찬가지였다. 점심시간 소등·컴퓨터 끄기, 커튼으로 직사광선 차단…. 절전 수칙이 스무 개를 넘었다. 전철의 냉방도 예전 같지 않았다. 세계 유수의 평판디스플레이용 유리기판 가공업체인 구라모토제작소(미야기현)는 휴일을 월·화요일로 옮겼다(자동차업체는 휴일이 목·금이다).

7월의 일본은 절전 모드 속에 있었다. 전후 부흥기의 DNA 그대로랄까. 전체 원전 54기 가운데 35기가 가동을 중지했지만 전력 위기는 없었다. 도쿄전력 관할의 7월 전력 사용량은 한 번도 공급량의 90%를 넘지 않았다. 올 공급량이 지난해보다 20% 이상 적은데도 말이다. 생산 거점의 80%가 지진 전의 수준을 회복했다(경제산업성, 6월 기준). 놀라운 속도다. 5개월 전 도호쿠(東北) 지방 500㎞의 연안을 덮친 쓰나미와 규모 9.0의 지진을 떠올려 보라. 일본 민간과 지방의 저력이다. 간 나오토 내각의 삐걱거리는 리더십과 피해 복구 현장은 딴판이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에 따른 전력 위기는 일대 논쟁을 부르고 있었다. 원전을 어떻게 할 것인가다. 안전신화 붕괴, 방사능 공포, 절전의 고통이 가져온 국가 백년대계 논쟁이다. 일본 지각이 태평양판과 맞닿아 지진과 쓰나미는 반드시 다시 온다는 불편한 진실, 유일한 피폭국으로서의 원전 알레르기, 산업의 장래가 얽힌 고난도 방정식이다. 현 상태에서의 동결인가, 감축인가, 궁극적 폐기인가. 간 총리는 ‘탈(脫)원전’에 매달렸지만 ‘감(減)원전’으로 절충됐다. 원전 감축분의 대안으로 내놓은 것이 재생가능한 자연에너지다. 태양광·풍력·지열·소형 수력이다. 산업계·전력회사·경제산업성은 반발하고 나섰다. 전력 부족 장기화, 생산비 상승, 이에 따른 기업의 해외 이전을 우려한다. 자연에너지 전력은 아직 소규모이고, 개발에 시간도 걸린다. 이미 퇴진을 표명한 간 총리가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데 대한 불신도 깊다.

 그러나 자연에너지 입국의 첫발은 내디뎌진 분위기였다. 탈원전을 지지하는 여론이 70%나 됐다. 간 총리를 지지하는 비율이 17%였던 지난달 교도통신 조사 결과다. 국민은 정책과 정치를 분리했다. 절전의 고통을 감내하겠다는 의식 혁명이다. 지자체도 탈원전이 대세였다. 후쿠시마현은 자연에너지에 의한 새 사회 만들기를 향후 10년간 비전으로 내놓았다. 원전 거점에서 자연에너지 이용의 새 모델로 거듭나겠다는 구상이다. 이와테현도 연안부의 태양광·풍력 발전을 전 지역으로 확대하는 ‘산리쿠 에코타운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었다. 지진 피해 지역만이 아니다. 소프트뱅크(사장 손 마사요시)의 대규모 태양광발전소(메가 솔라) 계획에는 35개 광역단체장(전체 47명)이 참가했다. 노는 땅에 태양광판을 설치해 전력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자연에너지의 보급이 확산되면 중앙집권적 에너지 구조는 지역 분산·자립형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새로운 일자리도 생긴다.

 자연에너지 보급 구상을 뒷받침하는 것이 일본 기업의 기술이다. 지열을 이용한 냉난방시스템 업체는 한둘이 아니었다. 도쿄의 벤처기업 시벨인터내셔널은 소형 수력발전기를 만들고 있었다. 물의 낙차가 없는 개울이나 농수로에 설치해 1~10㎾의 전력을 생산하는 장치다. 파나소닉과 미쓰이부동산은 태양전지를 이용한 도시개발에 나서고 있다. 원자탄에 피폭된 뒤 원자력으로 부흥을 이룬 일본이 문명과 원전에 대한 자연의 도전(3·11)에 맞서 자연에너지로 나라를 재설계하려는 발상이 흥미롭다. 일본은 아시아의 자연에너지 허브가 되는 것일까. 일본의 거대 실험을 지켜보자.

오영환 외교안보 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