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탐구] 하드코어 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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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금 등급의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한국에까지 일찍부터 잘 알려진 〈크림레몬〉은 85년에 첫 등장한 이후 대히트하여 90년대에 들어설 때까지 수십 편이 제작된 유명 시리즈 물이다.

이것은 보통, 미성년자의 소녀를 주인공으로 여성의 동성애 행위와 남매의 근친상간에 이르기까지 센세이셔널 한 주제들을 취급함으로써 일본 내에서도 한때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는 하드 코어 포르노 그래피 이다. 〈크림레몬〉 시리즈의 일부는 호러와 공상과학, 멜러드라마 등 타장르와의 혼합을 통해 형질적 변모를 도모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현재까지도 일본의 많은 애니메이션에서 흔히 발견되는 현상이다.

한국은 물론이고 전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초신전설 우로츠키 동자〉시리즈는 호러적인 장치를 도입하여 마치 하드 고어인 듯 위장하고 있지만, 그 배경에는 남성의 성기 노출이 직접적으로 이루어질 경우 검열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제약이 은밀히 도사리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되겠다.

결국 일본의 포르노그래피 애니메이션에서 하드 고어란, 하드 코어의 목적달성을 위한 일종의 전술에 불과한 것일 뿐이고, 더 나아가 그것은 일본문화 특유의 파괴의 미학과도 연결되어 사도-마조히즘을 철저히 구현하는 성적 왜곡과 과장을 화면 가득히 제공해 주기까지 했다.

하드 코어 아니메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충분한 섹슈얼리티를 담고 있다는 점 말고도 명랑, 코믹, 환타지, 액션 등 좋아할 만한 요소들을 제공하는 패키지식 전략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리얼리티에 기초한 코어 애니메이션은 오히려 소수이고, 거의 환타지와 스릴러, 액션 등이 복잡하게 배합되어 있으며 주된 소비계층이나 연령에 따라 〈요술공주 새리〉처럼 전체적으로 동화풍의 이야기에 살짝살짝 섹슈얼 코드를 섞는 '어린이용'이냐, 아니면 〈세라전사 비너스 파이브〉처럼 환타지와 섹스를 적당히 혼합한 '중저가 브랜드'냐 아니면 〈우로츠키 동자〉처럼 '완전 성인용'이냐가 세밀히 구분되어 있을 뿐이다.

일례로 '이노우에 오사무' 감독의 〈세라전사 비너스 파이브〉 시리즈는 마치 아동용에서 성인용으로 건너가는 요소를 골고루 함유하고 있는 듯 하다는 점이다.
세라 비너스 파이브의 내용을 소개 하면…

음마의 소굴인 마귀 궁전은 과연 음탕한 마귀의 본부답게 궁전의 기둥이 모두 남자 성기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중앙의 제단은 여러 갈래로 꽃잎을 벌린 여자 성기의 모양이다. 음마계의 두목 '메크로스'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동시에 가진 자로서, 성적 흥분상태에 도달한 소녀의 음액을 섭취하면 할수록 더욱 강해진다. 자신의 초능력을 완성하기 위해 4대 장군과 부하들을 데리고 지상에 내려온 메크로스는 어느 고등학교 선생으로 위장잠입해 희생자를 물색한다.

한편 마귀들과 싸우는 비너스 전사들은 평상시에는 남다를 게 없는 소녀들이지만, 일단 위기를 맞으면 상당히 육감적인 몸매를 지닌 비너스 그린, 핑크, 블루, 오렌지, 퍼플 등 다섯 전사로 변해 용맹하게 싸운다.

흥미로운 것은 변신, 합체의 초능력 주인공이 각자의 고유한 캐릭터를 가진 것처럼, 비너스 전사들 또한 복장에 따라 각각 차등화된 섹슈얼 코드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가령 핑크는 짧은 미니 스커트를, 오렌지는 아주 타이트한 쇼트 팬츠를, 가장 걸작인 비너스 퍼플은 서양의 하드 코어에서 흔히 여성의 공격적인 섹슈얼리티를 상징하기 위해 설정되는 거트 밴드를 착용하고 있다.

아직까지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은 채 호시탐탐 여학생들을 노리던 음마들은 드디어 어느날 무도회를 구실로 학생들을 모아 마취시킨 다음 그들의 소굴로 끌고 간다. 그 중 하나에 포함된 비너스 퍼플은 마귀들에게 포박당한 채 온몸을 성적으로 자극당하는 고문을 당하면서 체액에 담긴 음기를 잃어나간다. 순간 나타난 나머지 네명의 비너스 전사가 이들과 대적하려 하나 역부족으로 오히려 음마들에게 잡히고, 이때 비너스 여신계를 관장하는 천상여왕 가메가이가 나타나 그들을 도와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고 비로소 비너스 전사들은 퍼플까지를 합친 완전한 위력을 발휘하여 음마들을 모두 물리친다.

대부분의 일본 하드 코어들이 가장 선호하는 '연약한 소녀의 파괴되는 처녀성'을 대표하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 따라붙는 '비너스'는 보다 성숙한 여성성을 동시에 뜻하는 바, 결국 〈세라전사 비너스 파이브〉라는 제목 자체가 순결한 소녀가 초능력을 발휘하면 섹시한 여성 전사로 변해 악마들과 대결을 벌인다는 설정을 완벽하게 커버해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크림 레몬〉 시리즈에 이어 90년대 소프트 코어에 난공불락의 아성을 구축하고 있다. 특히 〈동급생〉은 그 시기에 동경하기 쉬운 풋풋한 연애담을 근거로 우리 사회의 기준으로 보면, 사춘기의 성행위를 '첫 경험의 미화'로 포장해내고 있다.

이 때의 첫 경험이란 물론 남자 쪽보다는 여자가 남자에게 처녀성을 잃는 경우로, 대개 남모르게 어떤 소년을 좋아하던 소녀가 그 남자에게 다가가 연모의 감정을 고백하면 소년은 마음을 열고 관계를 맺게 된다는 식이다. 여기에는 신파조의 대사, 감탄사, 애절한 호소 등이 더해져 청소년들의 감수성을 긁는 내는 것은 물론이며, 정사장면의 묘사는 처녀성을 범하는 남성의 정복욕을 고조시키도록 짜여져 있는데, 가령 처녀성을 잃는 소녀 가 약간은 수줍은 듯,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있다는, 나름대로 비장한 자세로 서 있으면 소년은 정복욕에 불타는 짐승의 모습으로 소녀를 위압해 들어간다.

소녀는 고통의 비명을 지르다가 곧이어 쾌락인지 신음인지 알 수 없는 뉘앙스의 소리를 내고 눈에는 사랑하는 남자에게 처녀성을 바쳤다는 자기 만족과 회한의 눈물이 동시에 흐른다. 그러면 소년은 감동스럽다는 표정으로 그것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처럼 '비록 고통스럽더라도 사랑하는 사람에게 처녀성을 바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는 일본 특유의 처녀성 탐식 이데올로기는 어쩌면 일본사회가 뿌리 깊게 지녀온 여성관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이 같은 코어 애니메이션이 나오는 것 자체는 물론 주 고객인 남학생들의 수요를 의식한 것이라고 해도 오히려 그보다는 처녀성을 잃는 행위를 마치 영광스러운 의식처럼 묘사하는 상업주의와 그것을 상품으로서 소비하는 일본인의 의식구조 자체가 우리와는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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