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초상화’로 두각, 육체 바라보는 새 방식 창안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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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호 04면

1.20일 타계한 영국의 현대미술작가 루치안 프로이트의 자화상. [AP=연합뉴스]

지난 7월 20일 외신은 영국의 대표적인 현대미술 작가 루치안 프로이트(1922~2011)가 88세의 나이로 타계했음을 일제히 타전했다. 정신분석학자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손자, 작품이 옥션에서 350억원에 거래되어 생존 화가로서 최고가를 기록한 작가, 사실주의 초상화가 등의 설명이 붙지만 어떤 것도 그를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길을 걸어온 그를 범주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가 20세기에 가장 영향력 있는 중요한 화가라는 것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20일 타계한 영국의 현대미술 작가 루치안 프로이트

베를린에서 태어나서 히틀러의 집권과 동시에 런던으로 이주해온 프로이트는 영국의 대표적인 작가가 되었다. 그가 작품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50년대는 초현실주의의 물결이 추상화로 넘어가고 있던 때로, 구상 인물화의 자리는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어떤 흐름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 루치안 프로이트는 인간의 몸(body)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을 창안해 냈다. 인물의 성격을 작가가 알고 있다는 초상화의 기본적인 전제를 그는 파기했다. 사람이 사람을 대면했을 때 인지상정으로 발생하기 마련인 이상화의 유혹도 그는 물리쳤다. “내가 진짜로 흥미를 느끼는 것은 동물로서의 사람”이라고 그는 말한다.

2 루치안 프로이트가 그린 영국 출신 수퍼모델 케이트 모스의 누드화 ‘naked Portrait 2002’는 2005년 2월 런던 크리스티 경매에서 392만8000파운드(당시 약 76억원)에 팔렸다. [중앙포토]

많은 작가가 사진에 근거해 그리지만, 그는 모델을 앞에 두고 그리는 옛날 방식을 고수했다. 짧게는 3개월에서 12개월이 걸리는 지루한 시간을 모델과 함께하며 눈앞에서 본 것을 그대로 그린다는 원칙을 지켰다. 그는 영국 여왕부터 동료 화가, 지인과 가족들 다양한 계층의 초상화를 그렸으나 이상화하지 않고 직시하는 접근 방식은 동일하다. 논란이 되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초상화 역시 예외는 아니다. 자료 사진은 여왕이 진주와 다이아몬드로 장식된 왕관에 푸른색 슈트로 성장을 하고 우호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결과물은 놀랍다. 어쩌면 그림보다 더 놀라운 것은 신성모독의 경지에까지 이른 자신의 초상화를 왕실의 소장품으로 기꺼이 받아들인 여왕의 인내력일지도 모른다. 왕관의 보석보다 더 강렬한 것은 그녀의 흰머리와 굵은 주름과 거친 얼굴의 윤곽선이다. 우리가 미디어를 통해서 본 우아함, 귀족다움, 자애로움 따위는 없다. 그림 속에서는 실질적인 통치권은 없는, 이제는 문화상품으로 박제된 여왕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다,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꾹 삼키듯. 그림은 여왕의 존재에 걸맞게 23.515.2㎝ 로 아주 작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것은 ‘벌거벗은 초상화’다. 성년에 이른 딸들이 적나라하게 다리를 벌리고 누워 그의 모델이 되기도 했으며 그의 전시에는 어린이 입장 불가 조치가 내려지기도 하였다.

굳이 누드라는 일반적인 용어를 적용하지 않고 ‘벌거벗은 초상화’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이 장르를 독창적으로 해석해냈기 때문이다. 서양미술사에서 누드란 인간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찬미와 관능성에 대한 탐닉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위해서 그려졌다. 육체의 아름다움은 곧 정신의 아름다움이었으며, 천진하고 순수한 영혼은 관능적인 유혹의 깊이를 더하게 마련이었다. 몸은 20세기 중후반부터 미술뿐 아니라 문화사 전반에 걸쳐서 중요한 화두가 됐다. 자코메티의 삐쩍 마른 고독한 몸들은 부조리한 세계를 묵묵히 견디는 고독한 현대인의 실존주의적 몸이다. 몸은 인간의 감정이 흐르는 통로이자 운반체이며 실존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물이 되었다.

할아버지인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초현실주의의 핵심인 무의식에 관한 이론을 제공했기에 사람들은 이 사조와의 친연성을 찾고 싶어했다. 하지만 루치안 프로이트는 “로트레아몽이 말한 수술대 위 우산과 재봉틀의 만남은 불필요하게 부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두 눈 사이에 코가 있는 것보다 초현실주의적인 게 어디 있겠는가?”라고 일축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은 지성사에서 이성의 결정적 패퇴를 의미한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가 아니며 본능 앞에 노출된 연약한 존재임이 밝혀졌다. 그 본능적 욕망의 모든 진원지는 바로 육체다. 루치안 프로이트는 그것을 그렸다. 그는 어떤 초현실주의자들보다 할아버지인 지크문트 프로이트를 더 잘 이해한 것 같다. 더 나아가 루치안 프로이트는 ‘당신의 육체는 바로 당신이다’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는 돼지털로 만든 거친 붓으로 소조를 하듯 육체를 빚어내고 얼룩덜룩한 피부 톤, 서로 다른 신체 부위들 간의 대조되는 질감으로 그림을 마무리한다. 그는 인간의 영혼을 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견딜 수 없는 육체의 유한성만을 보여준다. 그런데 육체야말로 영혼이 깃들어 있는 유일한 장소가 아닌가.

프로이트의 냉정한 시선 앞에서 모델들은 무방비로 무너지며 자신을 드러낸다. 최고가인 350억원에 팔렸던 ‘잠자는 공제 조합 감독관 Benefits Supervisor sleeping’(1995)의 모델은 150㎏이 넘어 보이는 통제되지 않은 몸을 드러낸다. 여성 누드에 기대하는 바의 아름다움이란 없다. 비대하고 육중하지만 그 몸은 강하지 않으며 견디어내야 할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이 화면을 지배한다.

아름다운 몸을 가진 수퍼모델도 예외는 아니다. 수퍼모델 케이트 모스가 임신했을 때의 누드 역시도 연약하고 불균형하고 불안정한 모습으로 그려졌다. 남성의 누드도 마찬가지다. 성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초상화에는 강인함과 영웅다움이라는 남성 누드의 전형적인 성격이 없다. 그것은 그저 누군가의 ‘벌거벗은 초상화’일 뿐이다. 육체의 아름다움도 영혼의 아름다움도 없다. 인간의 강인함과 존엄함은 육체적 허약함과 유한함으로 대체되어 우리의 연민에 호소한다.

이런 냉정하고 정직한 시선에서는 자기 자신도 예외는 아니다. 그는 피카소만큼 오랜 기간 다양하게 자화상을 그려왔다. 1993년 칠십이 넘은 작가는 알몸으로 끈이 없는 운동화를 신은 채 거울 앞에 서있다. 노쇠의 흔적은 피할 수 없이 그의 몸에 각인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무자비한 시간과 투쟁하며 자기를 증명해 보이려는 듯, 그림용 칼과 팔레트를 창과 방패처럼 들고 있다.
루치안 프로이트는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았다. 묵묵히 자기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 갔다. 그럼으로써 그는 누구보다도 위대한 화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가 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이 위대한 화가도 육체적인 쇠락과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우리에게 비보를 알렸고, 한 시대를 풍미하던 한 사람의 이름은 이제 역사가 되었다.


이진숙씨는 러시아에서 미술사를 공부하고 미술 작품에서 느낀 감동을 전하는 일을 하고 있다.『미술의 빅뱅』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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