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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밖 미술관 (3) 수원 ‘인계시장’ 프로젝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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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다리를 잘라 소파로 쓰는 안마베드가 이곳의 과거를 말해준다. ‘몸뻬’ 차림의 남자는 ‘인계시장 프로젝트’의 김월식 디렉터. 그는 “나는 뭔가 할 때마다 깨지고 실패했다. 2007년 안양 인덕원 유흥가서 예술마을 만들기 프로젝트 할 때도 그랬다. 밤늦도록 일해 돈 벌어 더 번화가로 진출해야 하는 그곳에서 예술이 뭐고 정주(定住)는 또 뭐겠나. 나 역시 이곳에서 재생을 도모한다”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경기도 수원시 인계동 1119번지 일대. ‘나혜석 거리’라고 관청에서 붙인 이름이 있지만 논다 하는 이들은 ‘인계동 박스’라 부르는 유흥업소 밀집지다. 술집·노래방은 물론이고, 안마시술소·호스트바·트랜스젠더바까지 이 방면엔 없는 게 없다.

기자가 찾아간 21일 오후, 밤 장사를 위해 쉬고 있는 거리는 한산했다. 어울리지 않는 나혜석 동상만이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나혜석(1896∼1948)은 수원 신풍동 태생으로 최초의 근대 여성화가다. 일찌감치 도쿄여자미술학교로 유학 다녀 와 성공 가도를 달렸으나 불륜으로 이혼 당한 뒤 사회에서 매장, 행려병자로 사망한 불행한 여인이기도 했다.

‘인계동 박스’에는 또 하나, 의외의 곳이 있다. 1997년 완공된 한 벽돌 건물. 여전히 2층엔 술집, 3층엔 노래방, 6층엔 당구장이 있는 이곳엔 몇 년 전까지 4·5층에 안마시술소가 있었다. 바깥 공기 한 번 안 마시고도 밤새 모든 종류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었던 곳이었다.

 그 안마시술소가 예술의 보금자리로 거듭났다. 음습한 욕망이 들끓던 곳에 예술가들이 들어와 시장 없는 이 동네에 ‘인계시장’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4층에선 작업실을 시장처럼 개방하고, 5층에선 먹고 잔다. 이른바 아티스트 레지던시(artist residency)다.

 내부 구조는 예전과 같다. 중앙에 홀이 있고 그 둘레로 11개의 방이 둘러 싸고 있어 감시·감독이 편한 구조다. 중앙홀은 모두가 밥 먹고 차 마시고 술 한 잔 하는 ‘재활용 바’로 재탄생했다. 밤에는 독특한 분위기에서 맥주 한 잔 하겠다고 손님들이 오는, 이곳의 수익 창출원이다. 다리를 잘라 소파로 사용하는 안마 베드가 이곳의 과거를 알려준다. 방마다 ‘유리손톱’ ‘인계목재’ ‘실밥’ ‘30년 전통 드로잉’ 등 개성 있는 간판을 걸고 10팀 11명의 예술가가 들어가 작업하고 있다. 주말엔 거리로 나가 작품을 판다.

 네일아트·목공·재봉·조명·동양화 등 분야도 다양하다. 방 하나는 전시공간 ‘마싸지 뮤지움’이다. 첫 전시 ‘서비스의 기준’에 이어 이곳에 입주한 네팔 작가의 ‘히말라야 사진전’이 예정돼 있다. 이어 미대 조교 출신들의 전시 ‘숙련된 조교의 시범을 보여 드립니다’도 준비 중이다.

 인계시장 프로젝트는 올 6월 말 시작됐다. 경기문화재단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창작지원금 일부를 댄다. 김월식(43) 디렉터는 “전국에 아티스트 레지던시가 60여 곳에 이른다. 순수 미술만을 위한 레지던시는 많다. 대체로 고립된 공간에서 자기만의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돼 있다. 우리는 지역과 교류할 수 있는 작업실을 한 번 만들어 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했다. 소위 도심형 레지던시다”라고 말했다.

조명작가 곽동열씨는 버려진 술병을 이용해 빨강, 노랑, 초록 아늑한 조명을 만들었다.

 ◆공간, 물건, 그리고 사람의 재생=여기서 재생한 것은 퇴락한 안마시술소라는 공간만이 아니다. ‘이런 부모가 되게 하소서’라고 한때 유행했던 글귀를 적은 버려진 액자, 길에 나뒹굴던 위성방송 안테나, ‘24형, 32형…최저 분양’ 등의 문구가 적힌 아파트 분양 현수막도 여기 오면 예술품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작가들. 미술을 전공했으나 생계·건강 등 여러 사정으로 붓을 놓았던 젊은이들이 이곳을 거점으로 재생을 도모하고 있다. ‘인계목재’의 천원진(37)씨는 조소과를 졸업했으나 친구의 목공소에서 5년 남짓 목공일을 하며 생계를 해결했다. 다시 생계가 아닌 창작에 몰두할 수 있게 된 그의 장기는 재활용 가구, 악기 만들기. 인계시장의 거의 모든 가구가 그의 손을 거쳤다.

 ‘죽도밥도 스튜디오’의 박영균(32)씨는 미대 졸업 후 이곳 저곳 떠돌아다녔던 기억을 살려 작업실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 회화·조각·사진·영상 등 안 다뤄본 매체가 없다. 20대에 희귀병인 ‘크론병’을 앓게 되면서 공부도, 진로도, 뜻대로 할 수 없었던 아픈 사연이 있다. 그는 요즘 버려진 액자를 리폼(reform)하거나, 옛 그림을 공판화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한다. “복을 기원하는 달마도 등 작업만큼은 밝았으면 하는 마음에서”다.

 지원금에 의한 첫 프로젝트는 일단 9월 말까지다. 가을부터는 멤버들도 남을지, 계속할지 거취를 정해야 한다.

김월식 디렉터는 “인계시장의 궁극적 목표는 재생이다. 공간도, 이 근방의 모든 물건들도, 그리고 미술을 전공했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미술을 떠나 있다가 돌아온 작가들도 미술계에서 재생하는 걸 목표로 한다. 또한 이 일대도 이곳을 플랫폼 삼아 문화 예술인들이 주민들과 교류하는 진정한 나혜석 거리로 재탄생 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수원=권근영 기자·신소영 인턴기자(중앙대 문헌정보학)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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