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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신문을 위한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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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상언
파리 특파원

영국 신문들은 극성맞다. 줄기차게 왕족·연예인·축구선수의 사생활을 캔다. 파이낸셜 타임스나 가디언 정도만 예외일 뿐 대개가 그렇다. 유명인에 대한 폭로담을 돈을 주고 사는 일도 흔하다. 휴양지에서 밀애를 즐기는 정치인을 망원 렌즈로 포착한 파파라치의 사진을 대문짝만 하게 싣는 것도 예사다.

 사건을 미주알고주알 파헤치는 것도 세계 최고다. 피해자·가해자의 ‘신상 털기’는 거의 일상이다. 납치나 실종 사건이 일어나면 당사자의 8촌이나 초등학교 동창까지도 찾아 나선다.

 함정 취재도 서슴지 않는다. 지난해 뇌물을 자주 챙긴다는 제보에 지목된 검사에게 기자가 민원인으로 가장해 접근한 뒤 돈을 받도록 유인하고는 이를 기사화해 검사의 옷을 벗긴 일이 있었다. 수개월 전 불거진 크리켓 승부조작, 국제축구연맹(FIFA) 임원들의 뇌물 수수 사건도 마찬가지다. 기자가 사업가나 로비스트로 위장해 뒷돈 거래를 제의하고 이를 수락하는 모습을 몰래카메라로 담아 폭로했다.

 표적 취재도 잦다. 선거 때만 되면 데일리 텔레그래프와 같은 보수당 지지 성향의 신문은 노골적으로 노동당 의원의 비리를 추적한다. 데일리 미러 등의 노동당 지지 신문은 반대로 보수당 의원들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된다.

 동종 업계 종사자로서 민망함을 느낄 만큼 도에 지나쳐 보이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다. 분명 정도에서 벗어난 부분이 있다. 최근 영국 사회에 큰 파문을 몰고 온 일요신문 뉴스 오브 더 월드의 취재원 휴대전화 음성 메시지 도청 사건도 이 같은 분위기와 무관치 않아 보인다. 하지만 이런 영국 신문들은 언론으로서 훌륭한 기능을 수행하는 면도 가지고 있다(도청과 같은 불법·부도덕 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우선 귀족이나 부호 등 상류층이 일탈을 꿈꾸기 어렵게 만든다. 정치인의 위선도 벗겨낸다. 1992년 영국 총선 때 막판까지 우세를 보였던 닐 키녹 노동당수는 대중지 더 선의 1면 사진에 결정적 상처를 입고 보수당수 존 메이저에게 패배했다. 노동자의 편이라고 외쳐온 그의 집에 고가의 집기들이 즐비한 모습이 사진으로 공개된 것이었다.

 연예인의 마약 복용 및 성매매, 정치인의 외도와 부패도 집중적으로 감시된다. 성폭행 혐의로 미국에서 재판받고 있는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전 총재가 영국에 살았다면 오래전에 사회적으로 매장됐을 가능성이 크다. 점잖은 프랑스 언론들은 그가 숱한 여성들과 외도를 했음을 알고서도 묵인했다.

 귀족 등의 특권층이 존재하는 계급사회 영국이 비교적 투명한 사회를 유지하는 데는 이런 열혈 언론의 역할이 크다. 그래서인지 영국인들은 신문을 좋아한다. 지난달 영국 주요 일간지 11개의 하루 평균 발행 부수는 950만 부, 주요 일요신문 9개의 한 주 평균 발행 부수는 860만 부로 집계됐다.

 도청 사건으로 영국의 대중지들이 저질 언론의 표본으로 지목받고 있다.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극성스러운 신문의 역할도 인정해줘야 한다. 세상은 그다지 고상하지 않을 때가 많으며 독자들도 이를 알고 있다.

이상언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