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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종수의 세상읽기

글로벌 경제 리더십 실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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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김종수
논설위원
경제부문 선임기자

대서양을 사이에 둔 세계 1, 2위 경제권이 희대의 치킨 게임을 벌이고 있다. 유럽연합(EU)과 미국이 동시에 최악의 국가 부도 사태를 향해 한발 한발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이 치킨게임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상대방을 향해 돌진하는 게 아니라 각자가 스스로 파국의 낭떠러지를 향해 달린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치킨게임과는 달리 자해공갈에 가깝다.

 미국은 다음 달 2일까지 정부부채 한도를 늘리지 않으면 채무불이행(디폴트) 상태에 빠지게 돼 있다. 그날부터 당장 빚을 얻을 수 없으니 정부가 써야 할 돈을 지출할 수 없게 된다. 공무원의 급여와 각종 사회보장비를 줄 수 없게 되고 정부의 투자도 정지된다. 최소한의 긴급한 대응을 제외하고는 중앙정부의 기능이 사실상 멈추게 되는 것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미 무디스와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피치 등 국제신용평가사들이 예고했듯이 미국의 채무불이행은 곧바로 미국 국채의 신용등급 강등을 의미한다. 달러 값과 국채 값이 폭락하고 금리는 급등하며 민간부문의 연쇄적인 채무불이행을 부른다. 금융시장은 대혼란에 빠지고 자칫하면 글로벌 금융위기를 능가하는 최악의 신용경색이 빚어질 수도 있다. 래리 서머스 전 백악관 국가경제위원장은 “미국의 디폴트는 리먼브러더스 파산과는 비교할 수 없는 대재앙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만일 이런 사태가 벌어진다면 일시적인 경기둔화 정도가 아니라 세계적인 불황이 재연될지도 모른다.



 대서양 너머 유럽에선 지난해부터 시작된 재정위기의 불길이 꺼지기는커녕 날로 확산되는 양상이다. 그리스에 대한 2차 지원이 늦어지면서 위기의 불길은 이미 정크본드 수준으로 신용등급이 떨어진 아일랜드와 포르투갈·스페인을 넘어 EU 3위의 경제대국 이탈리아를 향하고 있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국채 금리는 연일 사상 최고 수준으로 치솟으며 불안감을 키우고 있다. 자칫하면 유럽 전역에서 국가 부도의 도미노 사태가 벌어질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이다. EU가 그리스 사태를 수습하지 못하고, 남유럽 국가들이 국가 부도에 직면하면 EU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유로화의 폭락과 함께 유로존이 붕괴하고 채권은행들의 연쇄 파산이 불가피하다. 유로존의 붕괴가 세계경제에 미칠 충격파는 상상의 범위를 넘어선다.

 미국이나 유럽의 정치지도자들은 모두 국가 부도가 불러올 파멸적인 사태를 충분히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위기를 막을 수습책을 이끌어낼 만한 리더십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정부 부채한도 인상을 두고 대립하고 있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공화당 지도부는 자신들의 주장을 굽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인다. 정부 부채한도 인상의 전제조건인 부채 감축 방안을 두고 오바마 대통령은 세금을 더 걷어서 해결하자는 입장이고, 공화당은 정부 지출을 줄이자는 입장이다. 일견 양측의 주장을 절충하면 해결책이 나올 듯도 싶지만 여기서 더 물러서면 내년 선거에서 진다는 정치적 계산이 앞서면서 양측의 대립은 사생결단의 이념적 참호전으로 비화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국가 부도라는 시한폭탄의 초침은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다.

 유럽의 재정위기에 관한 한 EU 지도자들이 시장의 신뢰를 잃은 지는 오래다. 그리스 사태가 불거진 지가 언제인데 여태껏 확실한 수습책에 합의하지 못하고 있으니 말이다. 유럽 각국은 독일의 양보와 적극적인 역할을 기대하지만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국내의 반대여론을 의식해 원칙론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있다. 이 판에 부도 위기에 몰린 이탈리아에선 총리가 공개석상에서 재무장관의 미흡한 대처를 비난하고, 여기에 재무장관이 반발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다. 유럽 각국은 나라별로 이해가 엇갈리고, 각국은 또 내부적으로 정치적 이해득실을 따지기에 바쁘니 EU 전체의 수습책이 쉽사리 나올 리가 만무하다.

 미국이나 EU의 국가 부도가 불러올 잠재적인 폭발력은 그간의 경제위기보다 결코 작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수습할 국제적인 리더십은 사실상 실종 상태다. 미국과 유럽 모두 국내적 정치게임을 벌이느라 국제적인 공조나 협력에 나설 겨를이 없다. 제 코가 석 자인데 바다 건너 남의 나라 부도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는 것이다. 아시아 외환위기나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는 사뭇 딴판이다. 미국이 리더십을 잃은 것은 물론이고, G7이나 G20의 국제공조도 전혀 발휘되지 않고 있다.

 그 배경에는 글로벌 경제축이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선진국에서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냉엄한 현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동안 세계경제의 중심축을 이뤘던 미국과 유럽이 빚더미에 눌려 힘을 쓰지 못하게 된 반면, 떠오르는 중국과 브라질·인도 등 신흥국들은 세계경제를 좌우할 리더십을 발휘하기에는 아직 역량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이 제 머리를 못 깎는 가운데 신흥국들도 남의 나라 문제에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처지가 못 된다. 세계경제에 리더십의 공백상태가 빚어진 것이다.

 예고된 위험은 위험이 아니라고 한다. 미국과 EU가 이미 예고된 최악의 국가 부도 사태를 피할 수습책에 극적으로 합의할 가능성은 여전하다. 그러나 상황이 수습된다고 해서 미국과 EU의 경제적 취약성이 단박에 해소되는 것도 아니고 글로벌 경제 리더십을 되찾을 것 같지도 않다. 글로벌 리더십의 부재 속에 세계경제의 불안정성과 변동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김종수 논설위원·경제부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