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백두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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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의 하계 답사 첫 일정으로 백두산(白頭山)에 올랐다. 백두산을 민족의 영산(靈山)으로 여기는 우리는 ‘중국에서 일부러 장백산(長白山)으로 쓴다’고 여기지만 오해가 좀 있다. 여진족(만주족)이 세운 금(金 : 1115~1234)나라의 정사인 『금사(金史)』 『본기 세기(本紀世紀)』에도 “생여진 땅에는 혼동강(混同江 : 흑룡강)과 장백산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오래전부터 장백산이란 표현을 사용해 온 셈이다. 봉우리에 늘 흰 눈이 쌓여 있어 백(白)자를 쓴 것이다.

 1925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일제 식민사학에 대항하는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제창하면서 주목한 것도 ‘백(白)’자였다. 육당에 따르면 백(白)은 태양·하늘 등을 뜻하고, 태백(太白)·소백(小白) 등 여러 백산은 태양신을 제사하던 곳이다. 그 중심을 백두산이라고 보았다. 불함이란 말은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에 “대황(大荒) 가운데 산이 있는데 이름이 불함(不咸)”이라고 처음 나온다.

 백두산의 옛 명칭이 불함산인데, 최남선은 동방문화의 원류가 ‘ ’ 사상이고, ‘ ’의 가장 오랜 자형이 불함이라고 말했다. 최남선은 1927년 『백두산 근참기(覲參記)』라는 답사기 제목에 ‘뵐 근(覲)’자를 쓸 정도로 백두산을 신성시했다. 이 글에서 최남선은 “조선 인문의 창건자는 실로 이 백두산으로써 그 최초의 무대를 삼아서 이른바 ‘홍익인간’의 희막(戱幕)을 개시하고, 그 극장을 이름하되 신시(神市)라 하였다”고 말했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단군이 내려와 신시를 세운 태백산(太白山)을 묘향산(妙香山)이라고 본 것은 잘못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신당서(新唐書)』 『흑수말갈 열전』에는 백두산에 대해 “태백산인데, 또한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부른다”라고 적혀 있다. 당나라 때 이미 태백산으로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당 태종 때 편찬한 『북사(北史)』 『물길(勿吉) 열전』은 “나라 남쪽에 종태산(從太山: 백두산)이 있는데, 중국어로는 태황산(太皇山)이라고 한다. 그곳 풍속에 이 산을 심히 경외(敬畏)해서 산꼭대기에서는 오줌을 누어 더럽히지 않고 산에 오른 자는 오물을 거두어 갔다”고 전하고 있다. 『북사(北史)』는 또 “산 위에는 곰·범·이리(熊羆豹狼)가 있는데, 모두 사람을 해치지 않고, 사람도 감히 죽이지 않는다”고 말해 마치 사람과 곰·범이 얽히는 단군 사화(史話)를 전해 주는 듯하다. 지금은 비록 절반이 이국 땅이 되었지만 백두산은 역시 민족의 원향(原鄕)이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