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CEO] 上. 그래도 길은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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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뚝산업' 으로 불리는 전통적인 제조업체의 최고경영자(CEO)들이 흔들리고 있다. 벤처.인터넷 비즈니스가 각광을 받고 코스닥 시장이 거래소 시장을 압도하면서 기업 경영의 패러다임이 급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CEO들은 젊은 사원들이 서슴없이 벤처로 옮겨가는 모습을 보면서 수십년 동안 현장을 지키며 쌓아온 경영 노하우가 쓸모없다는 자괴감에 빠져들고 있다. 이런 가운데 경영자들은 직원들 모르게 인터넷을 익히는가 하면 넥타이를 풀고 머리를 염색하는 등 변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흔들리는 CEO의 모습과 적응 노력, 선진국의 실상을 세차례로 나눠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중견 섬유업체 사장인 A씨(56)는 최근 친하게 지내는 모그룹 B회장을 찾아갔다. 부끄러워 주변에 이야기조차 못했던 신세를 털어놓고 해결 방안을 구했다.

건실하게 회사를 운영하던 A사장이 다른 마음을 먹은 것은 지난해 말. "주변에서 인터넷이다, 디지털이다 하는데 잠이 오지 않더라고요. 따라가지 않으면 도태될지 모른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습니다. 그렇다고 옷을 만들면서 무슨 인터넷 사업을 합니까. 컴퓨터라면 무서운 생각부터 들거든요. 사장이 흔들리는데 직원들이 일손이 제대로 잡히겠어요. 하루하루 생산성이 떨어지고 수출이 줄고 실적이 나빠지더니 직원들이 하나 둘 벤처로 떠나더군요. 이러다간 회사가 거덜날 판입니다."

A사장은 회사를 팔아치우고 남는 돈으로 벤처 투자나 하겠다며 B회장의 자문을 구했다. B회장은 "아무리 인터넷 세상이 돼도 옷은 입어야 하지 않겠느냐" 면서 "지금이라도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라" 고 조언했다.

전통적인 제조업체 최고경영자(CEO)들이 요즘 갈피를 못잡고 있다. 디지털.인터넷.벤처로 대표되는 최근의 변혁은 20~40여년 동안 사업하면서 전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것이어서 판단도, 결정도 어렵기 때문이다.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세미나에도 참석하고, IT혁명과 관련된 책도 읽고, 성공한 벤처 경영자도 만나보지만 뾰족한 해답이 없다.

"인터넷 비즈니스의 속성이 무엇인지, 과연 인터넷 사업을 통해 수익을 올릴 수 있을지, 남들이 한다고 따라가야 하는 것인지 도대체 판단이 안섭니다."

모그룹 부회장은 "투입에 따른 확실한 산출이 계산되지 않는 상황에서 투자를 함부로 결정할 수는 없지 않느냐" 고 말했다.

막상 인터넷 투자를 결정하고도 e-비즈니스 사업이 이미 과잉이라 막차를 타는 것 아니냐는 두려움도 있다.

한국경제연구원 이인실 연구위원은 "CEO들이 '굴뚝산업' 을 포기했다가는 후회할 것 같고, 그렇다고 추락하는 주가를 바라보며 그냥 앉아 있기에는 불안해지는 등 모두가 새로운 길을 걷는 과정에서 CEO들이 리더 노릇하기 힘든 시대가 됐다" 고 지적했다.

더 큰 문제는 기업경영 의욕의 감퇴다.

LG전자 협력업체인 동양산업 박용해 사장은 "주변에 신산업 열풍이 불면서 사업영역을 바꾸는 기업이 많다" 며 "국내 최대의 제조업체인 삼성전자의 주가가 신생 벤처보다 낮다는 사실만으로도 제조업체 사장들은 사기가 떨어진다" 고 말했다.

모 기계업체 사장(55)은 지난해말 자신이 20여년 동안 일군 회사의 지분을 다른 사람에게 통째로 넘긴 뒤 남은 현금 수백억원으로 벤처투자에 뛰어들었다.

제철업체 모 사장은 "벤처 열풍 속에서 사무직 직원까지 슬금슬금 빠져나가 기업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면서 "제품의 전자상거래망을 구축하고 업무 효율을 높이기 위해 인터넷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제철회사가 본업은 제쳐두고 벤처 투자나 인터넷 포털서비스를 할 수는 없지 않느냐" 고 말했다.

그러나 CEO부터 생각을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지난해 말 30대 그룹 중 한 곳은 인사를 발표하기 전에 진통을 겪었다.

'온라인 사업에 익숙하지 않은 계열사 CEO의 대부분을 내보내야 한다' 는 회장과 '급격한 변화는 더 큰 부작용을 몰고 온다' 는 회장 핵심 측근과의 논란 때문. 결국 이 그룹은 일부 원로급을 고문으로 앉히는 데 그쳤다.

이 그룹 회장은 "급변하는 e-비즈니스 기업환경으로 볼 때 오프라인 사업에 익숙한 경영진은 모두 내보내야 할 정도" 라며 "유예기간을 주고 교육시켜 따라올 가능성이 있는 사람만 안고 갈 생각" 이라고 말했다.

"최고 경영자는 어느 줄기가 변화의 본류인가를 찾아내 그곳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데 요즘은 정말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부엌가구에 관한 e-비즈니스 사업에 분주한 한샘 최양하 사장은 "기존의 오프라인 일도 다 하면서 온라인의 신규 사업을 쫓아가야 하는 절박함이 있다" 며 "스피드 경영이라는 말을 요즘처럼 실감한 적이 없다" 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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