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미 공화국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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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5호 02면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 Durkheim· 1858~1917)은 약 100년 전에 그의 저서 자살론에서 아노미(Anomie)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규범이 사라지고 가치관이 붕괴하면서 나타나는 사회적·개인적 불안정 상태를 지적한 것이다. 아노미 상태에 빠지면 뭐가 옳고 그른지 기준이 혼미해진다.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그러다 보면 삶의 가치와 목적 의식을 잃고, 무력감과 자포자기에 빠져 자살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게 뒤르켐의 설명이다. 그런데 어째 이런 얘기가 우리가 잘 아는 어떤 공동체를 묘사하는 것 같지 않은가. 그렇다. 아무리 봐도 대한민국의 요즘 모습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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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요지경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언론은 걸핏하면 교사가 학생과 학부모에게 맞았다고 보도한다. 그런데 때린 학생이 퇴학당하거나 학부모가 법적 처벌을 받았다는 얘기는 거의 없다. 선진국들도 대부분 교사 폭력을 금한다. 하지만 학생이나 학부모가 교사를 폭행하면 지역사회 전체가 발칵 뒤집힐 것이다. 기준이 없는 게 어디 학교뿐인가. 공무원, 그중에서도 국가 강제력의 정당성을 대변하고 수호해야 할 검찰을 보자. 최근 검찰 최고위 간부들이 자기 조직의 이해관계를 앞세우며 무더기로 사표를 내겠다고 했다.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은 검찰총장까지 그 대열에 동참했다. 누가 봐도 임명권자인 대통령과 국민에 대한 협박성 시위다. 하지만 역시 아무에게도 책임이 돌아가지 않았다. 지지도 추락으로 고심하는 청와대는 국민을 불안케하지 말라고만 했다.

요샌 지하철에서도 걸핏하면 노인 세대와 젊은 세대가 충돌한다. 막말남, 개똥녀, 이름도 다양하다. 그걸 인터넷에 올려놓고 죽일 놈, 살릴 놈 난리를 친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안다. 그걸 몰래 찍어서 올릴 수는 있어도 현장에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없는 건 또 있다. 대한민국에 부자는 많다. 하지만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처럼 건강한 자본주의를 위해 상속세를 유지하자고 주장하거나 내 자식에겐 불로소득으로 큰 재산을 상속하지 않겠다는 부자는 없다. 덩달아 부자들에 대한 존경심도 없다. 사회만 그런 게 아니다. 뭔가 혼란스럽긴 영혼과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종교계도 마찬가지다. 정진석 추기경은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로부터 조롱을 당했었다. 대한민국 이외에 어느 나라 천주교에서 이런 하극상이 존재하는지 알 수 없다. 좀 다른 의미지만 불교계도 마찬가지다. 불교계의 맏형 격인 조계종이 부처님 자비의 도량(道場)인 사찰에 특정 정당 사람들은 들어오지 말라고 선포하는 걸 흔쾌히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솔직히 말해 신문과 신문, 신문과 방송이 벌이는 이전투구를 감안하면 기자인 내가 여기서 누굴 비난할 처지도 아니다.

에밀 뒤르켐을 원용해 얘기한다면 한국은 가히 ‘아노미 공화국’이다. 이런 사회에선 뭐가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 힘들다. 왜 이렇게 됐는지는 뻔하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은 숨가빴다. 개발 독재도 겪고, 산업화도 이루고, 민주 항쟁도 겪고, 진보정권도 들어섰었고, 세계화의 파도에도 휩쓸렸다. 그래서 국민소득 2만 달러에, 세계 10위권의 무역대국도 됐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가치와 권위는 와르르 무너졌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적 기준과 규범은 아직 들어서지 못하고 있다.

국민소득만 선진국인 나라는 없다. 선진국에 가보면 그 사회가 공유하는 뚜렷한 중심 가치가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대한민국이 ‘아노미 공화국’ 상태로 계속 가게 된다면 경제도 다시 추락하게 될 것이라는 불길한 예감이 든다. 모 방송사 기자인 내 친구가 아프리카를 취재하고 돌아와 한 얘기가 기억난다. “무정부가 독재보다 더 무섭더라. 독재국가에선 하지 말란 것만 안 하면 되지만 무정부 국가에선 언제, 어디서 총탄이 날아올지 알 수가 없으니 말이야.”

지금 같은 아노미 상황이 계속되다 모두가 공멸하는 결과를 맞을지도 모른다. 우리 스스로 자문해보자. 대한민국을 그렇게 만들기엔 지금까지 이룩한 성과가 너무 아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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