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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권사와 스캘퍼 ‘은밀한 거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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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2009년 말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H증권 본점에서 중년 남성 5명이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참석자는 이 증권사에 재직하다가 퇴직한 손모(40·구속기소)씨와 동료 3명, 그리고 이 증권사 직원인 백모(38·구속기소)씨였다.

 손씨는 스캘퍼(초단타매매자)였다. 주식워런트증권(ELW) 단타매매를 업으로 삼았던 그는 전문 투자자 3명을 만나게 되면서 스캘퍼 조직을 통한 대규모의 초단타매매 아이디어를 구상하게 됐다.


이들은 의기투합해 여의도백화점에 사무실을 마련했고 ‘여의도백화점’을 줄여 ‘여백팀’이라는 조직명까지 지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활동을 위해서는 증권사의 도움이 필요했다. ELW 거래 속도를 향상시키는 프로그램이 깔린 증권사 전용 회선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ELW는 최대한 빠른 시간에 주문이 체결될 수 있느냐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증권사 전용 회선은 방화벽 등의 보안장치를 거치지 않는 특수 회선으로 일반 회선보다 속도가 3~8배나 빠르다. 손씨의 요구는 백씨를 통해 상급자들에게 전달됐고 이 증권사는 손씨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로 했다. 여백팀은 2009년 말부터 올해 2월까지 H증권 등 3개 증권사의 전용 회선을 통해 77조원을 거래했고 300억원의 수익을 챙겼다.

 이들은 ‘귀하신 수퍼메뚜기’였다. 스캘퍼들을 통해 증권사가 챙기는 반대급부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ELW 시장의 거래 수수료는 지난해 710억원에 달했는데 이 중 스캘퍼들의 거래로 발생된 수수료 비중이 절대적이다. 시장점유율 상승 효과도 빼놓을 수 없다. 실제 이들을 동원해 점유율을 15%까지 끌어올린 증권사도 있었다. 스캘퍼들은 일반투자자를 끌어들이는 ‘미끼’ 역할도 했다. 한 증권사는 여백팀에 한 달 임대료가 1000만원에 달해 속칭 ‘부티크’로 불리는 호화 사무실을 임대해 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뒤에는 ‘개미’의 눈물이 있었다. 애초부터 출발점이 다르다는 사실을 모른 채 ELW 시장에 투자했던 일반투자자들은 판판이 깨졌다. ELW 시장은 출범한 지 5년여 만에 홍콩에 이은 세계 2위의 시장으로 급성장했지만 일반투자자들은 매년 이 시장에서 수백억~수천억원의 손실을 봤다. 이 때문에 ELW 시장은 ‘개미들의 무덤’ ‘악마의 유혹’ ‘여의도에 개설된 카지노’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으로 불리고 있다. 검찰은 그 배경에 증권사와 스캘퍼 간의 ‘야합’이 있다는 정황을 포착해 그 중심을 타격했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2부는 23일 자본시장법 위반 등 혐의로 손씨 등 스캘퍼 2명과 백씨 등 증권사 직원 2명을 구속기소하고 44명을 불구속기소했다. ‘스캘퍼 활용방안’에 사인해 준 삼성증권·대우증권·한맥투자증권·신한금융투자·대신증권·유진투자증권·현대증권·LIG투자증권·우리투자증권·이트레이드증권·HMC투자증권·KTB투자증권의 전·현직 대표들도 법정에 서게 됐다.

박진석·손해용 기자

◆스캘퍼(Scalper)=일명 수퍼메뚜기. 대표적 단기투자자인 ‘데이트레이더’들보다 더 짧은 시간 단위로 거래하는 초단기투자자를 말한다. 보통 하루 2~3분 단위로 수십~수백 번 거래에 나서 단기 시세 차익을 챙긴다. ‘가죽 벗기기’라는 의미인 ‘스캘핑’에서 유래됐는데 이는 가죽처럼 얇은 이윤, 즉 ‘박리(薄利)’를 챙긴다는 의미다.

◆주식워런트증권(ELW)=개별주식 및 주가지수 등의 기초자산을 미래 특정 시점(만기일)에 미리 정해진 가격(행사가격)으로 사거나 팔 수 있는 권리를 나타내는 유가증권. 선물·옵션 등 파생상품과 달리 일반주식 계좌에서 소액으로도 거래가 가능하다. 급성장을 거듭해 지난해 하루 평균 거래대금이 1조6374억원에 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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