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조원대 ‘국제 M&A’ 노하우 무장 외국 로펌…삼성·현대차 해외 자문시장까지 파고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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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9월 한국석유공사가 영국 석유탐사업체 다나 페트롤리엄(Dana Petroleum)을 인수했다. 수조원에 이르는 이 거래에서 링클레이터스(Linklaters)와 앨런 앤드 오버리(Allen & Overy)가 각각 석유공사와 다나 측을 대리했다. 양쪽 모두 영국 로펌이었다. 국내 최대 로펌인 김&장도 석유공사 쪽 자문에 참여했지만 영국 로펌들이 거래를 주도한 것이다. 한국이 에너지 자원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은 최근 들어서다. 경험과 노하우를 축적할 기회 자체가 국내 로펌에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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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으로 영국 등 유럽연합(EU) 로펌들이 서울에 사무소를 내고 상주하게 되면 국내 대기업들의 대형 국제거래가 이들 로펌 손에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 본지와 한국외국어대 로스쿨 교수팀이 국내 주요 로펌 10개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에서는 이 같은 우려가 그대로 반영됐다. 국내 로펌들은 해외 로펌에 비해 자신들이 취약한 분야로 에너지 자원 개발과 인수합병(M&A), 기업금융 분야 등을 꼽았다. 이들 분야는 거래액이 조 단위에 이를 정도로 크고, 국내 기업의 해외 진출이 늘면서 수요가 빠르게 확대되는 ‘성장 시장(Growth Market)’이란 특징이 있다. 반면 국내 송무와 부동산 개발, 공정거래, 노동, 정보통신 등은 상대적으로 자신 있는 분야로 꼽혔다.

 그러나 최정환 대한변호사협회 국제이사는 “국내 송무·자문 시장만 지켜서 될 일이 아니다. 삼성·현대차 등 우리나라 대기업의 해외 자문 시장을 뺏기는 것이 더 큰일”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법률서비스 국제수지는 이미 5000억원 넘게 적자가 나고 있다. 지난해 국내 기업이 해외 로펌에 법률자문료로 지급한 금액은 1조2700억원에 달한다. 국내 로펌이 해외 기업으로부터 받은 금액은 7050억원에 그쳤다.


 문제는 대기업 해외자문 시장을 잠식당하게 되면 국내 법률시장 전반에 연쇄 충격이 올 수 있다는 점이다. 최 이사는 “국내 대형 로펌들이 국제 자문에서 눈을 돌려 송무 등 국내 부문에 치중하게 되면 중소 로펌, 서초동 개인변호사들까지 도미노처럼 충격을 받을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 대형 로펌의 대표변호사는 “대형마트가 동네에 들어오면 구멍가게가 흔들리듯이 대형 로펌이 중소 로펌이 맡던 업무까지 손을 대게 되면 결국은 개인변호사가 사무실 문을 닫는 사태가 올 것”이라고 말했다.

‘7·1 법률시장 개방’으로 국내 최대 로펌인 김&장에도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다. 사진은 서울 종로구 내자동 김&장 법률사무소의 프런트데스크. [조문규 기자]

 이런 가운데 국내 로펌 중에는 유럽 로펌과 공동 전선을 형성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나고 있다. 이번 조사에 응한 10개 로펌 중 5곳이 “2단계 개방이 되면 유럽 로펌과 공동으로 업무를 처리하고 수익을 분배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상대적으로 로펌 규모가 작을수록 이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취약 분야를 보완하고 국내 기업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유럽 로펌과 손을 잡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청한 한 로펌 변호사는 “만년 7~8위보다는 세계적인 로펌과 손을 잡고 ‘반전’을 노리지 않겠느냐”며 “로펌 순위가 완전히 재편되는 ‘빅뱅’도 가능하다”고 전망했다.

 이에 반해 상위권 로펌들은 특정 EU 로펌과 제휴하는 것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시스템과 이해관계가 다를뿐더러 토종 로펌으로서의 자존심 문제라는 것이다. 법무법인 세종의 김범수 변호사는 “유럽 로펌이 당장 국내 로펌과 합병에 나서기보다는 특정 분야의 팀 자체를 영입하는 등의 방법을 택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국내 로펌들은 법률시장 개방에 대비해 로펌의 덩치를 키우고 전문성을 높이는 데 힘써 왔다. 그러나 영미계 로펌과 비교했을 때 수익 분배 구조나 의사 결정이 체계화돼 있지 않다. 국내 로펌의 스타 변호사들이 합리적인 보상 구조가 확립된 영미계 로펌 쪽으로 이탈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국내 대형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는 “스카우트 경쟁이 벌어지게 되면 결국 변호사 연봉이 올라가고 이에 따라 수임료도 상승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설문조사에서도 10개 로펌 중 5곳이 “국내 로펌과 외국계 로펌 모두 수임료가 오를 것”이라고 내다봤다. “양쪽 모두 현재와 동일한 수준으로 유지될 것”이라고 보는 로펌은 3곳이었다. 한 변호사는 “해외 대형 로펌의 수임료는 국내 로펌의 3~4배 수준으로 시간당 1000달러가 넘는 경우도 있다”며 “국내 법률시장 전체의 수임료 상승 압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글=구희령 기자
사진=조문규 기자

◆김&장 법률사무소=국내 1위 로펌으로, 변호사 수는 510명이다. 연간 매출액은 4500억~5000억원으로 추정된다. 1973년 1월 김영무 변호사가 설립하고 같은 해 말 장수길 변호사가 합류해 ‘김&장’이 됐다. 법인 형태인 다른 로펌과 달리 조합 형태로 운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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