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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앞에 평화로운 암환자들, 자신을 깨달은 이들이더군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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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로저 콜 박사는 20년 넘게 요가 명상을 하고 있다. 의사인 그는 30여 년간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을 돌보며 의학 치료에 영성을 접목했다. “영적인 훈련은 우리의 일상과 동떨어진 게 아니다. 아름다운 삶을 체험할 때 비로소 우리는 아름다운 죽음을 체험하게 된다”고 말했다. [김도훈 기자]

죽음을 눈 앞에 둔 환자에게 의사는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환자가 겪는 심리적 고통까지 치유할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 그 두려움까지 쓰다듬을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안고 10일 한국을 찾은 영국 출신의 의사 로저 콜(56·호주 울런공 의학전문대학원 교수)을 만났다. 런던 킹스 칼리지에서 종양학을 전공한 그는 1984년 세계적인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 엘리자베스 퀴블러의 워크숍에서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이후 20년 넘게 요가 중에서도 명상에 중심을 둔 라자 요가(Raja Yoga)를 하고 있다.

그는 물리적으로 환자를 치유하는 의사의 역할에 영성을 접목하고 있다. 지금껏 수천 명의 말기암 환자와 마주했다. 환자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치유를 지켜봤다. 그의 대표작『사랑의 사명(Mission of Love)』(판미동)이 최근 국내에 나왔다. 호주·캐나다·브라질·일본 등 9개국에서 출간된 책이다. 콜 박사에게 ‘삶과 죽음, 치유’를 물었다.

 -죽음에 관한 책인가.

 “죽음을 눈앞에 둔 이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어떻게 해야 ‘아름다운 죽음’을 맞을 수 있을까. 역설적이지만 ‘아름다운 삶’에 대한 이야기다. 아름다운 삶을 체험할 때 아름다운 죽음이 가능하고, 평화로운 삶을 체험할 때 평화로운 죽음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추상적이다. 실제 그런 환자가 있었나.

 “내게 가장 심오한 가르침을 줬던 환자가 있었다. 그녀는 54세였다. 유방암으로 5년째 투병 중이었다. 성공한 사업가였고, 굉장한 성취가였고, 사회적 파워도 있었고, 존경 받았고, 지역사회 의사결정에도 참여하는 분이었다. 그녀의 몸은 점점 쇠약해졌다.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나를 찾아왔다. 그리고 물었다. ‘닥터 콜, 제가 어떻게 하면 놓아버릴 수가 있나요? 저는 당신의 책을 다 읽었어요. 책을 읽었는데, 그대로 다 했는데, 지금도 놓아지질 않아요. 어떻게 하면 놓을 수가 있나요?’”

 -막막했겠다. 뭐라고 답을 했나.

 “아무런 할 말이 없었다. 그녀가 정말 내면에서 모든 안간힘을 쓰는 게 보였다. 놓아버리기 위해서 말이다. 순간 나는 강한 무력감을 느꼈다. 그녀가 느끼는 무력감을 나도 똑같이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책에서 이미 다 말했다. 그걸 다 읽었다니, 달리 무슨 말을 하겠는가. 조용히 함께 앉아 있었다. 침묵 속에서, 고요 속에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렇게 공감을 했더니 그녀가 보였다.”

 -어떤 ‘그녀’가 보였나.

 “그녀는 많은 걸 달성하고, 성공 가도를 달려온 사람이었다. 죽음에서마저도 ‘성공’을 경험하고 싶어하는 그녀가 느껴졌다. 이렇게 말했다. ‘아무 것도 할 게 없습니다. 아무 것도 놔줄 게 없습니다.’ 그랬더니 그녀가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Thank God for that!)’라고 하더라. 그 순간, 그녀는 놀랄 만큼 평화로워졌다. 더 이상 투쟁하지 않았고, 모든 걸 수용하고, 완전히 평화로워졌다. 그렇게 죽음을 직면했다. 내게 심오한 가르침이었다.”

 -어떤 가르침이었나.

 “그녀가 왜 평화로워졌을까. 그게 중요하다. 그녀는 성공적인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붙들고 있었다. ‘아무것도 놔줄 게 없다’는 말을 듣고서 그 집착을 놓아버린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붙들고 있는 걸 놓을 때 에고(ego)가 녹는다. 그런 식으로 에고를 놓으면 우리 내면에 있는 영원성이 드러난다.”

 이 말끝에 콜 박사는 이런 구절을 읊었다. ‘죽음이 오기 전에 내가 죽어버리면, 실제 죽음이 왔을 때 내가 죽지 않는다. (If you die before you die, then when you die you will not die)’ 의미심장한 문구였다. ‘육신의 죽음을 맞기 전에 에고를 내려놓으면, 육신의 죽음을 맞더라도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에고가 무너진 자리로 ‘내 안의 영원성’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최근 영국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인간의 뇌는 부속품이 고장 나면 작동을 멈추는 컴퓨터와 같다. 고장 난 컴퓨터를 위해 마련된 천국은 없다”고 말했다. ‘내 안의 영원성’을 부정한 셈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는 순수하다. 그런데 자라면서 아주 미묘하게 에고가 생겨난다. 에고는 늘 육체를 자신과 동일시한다. 그게 ‘육체의식(Body consciousness)’이다. 호킹 박사는 ‘육체의식’을 넘어서는 눈을 가지진 않았다. 그래서 유한한 존재로 머문다. 내면에 있는 ‘영적 의식(Spiritual consciousness)’에 눈을 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든지 지혜로워질 가능성은 있다. 호킹 박사 안에도 이미 ‘내면의 영원성’이 담겨 있으니까.”

 -아름다운 삶, 아름다운 죽음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

 “평화롭게 죽어가는 환자들을 지켜봤다. 그들은 평화로운 죽음을 맞기 전에 평화로운 삶을 먼저 체험하더라. 평화로운 삶을 위해선 ‘이해하기’와 ‘받아들이기’가 중요하다. 현대인이 망각하는 중요한 게 있다. 바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일이다. 자신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면 남도 이해할 수 없다. 내 안에서 좋은 점을 찾아야, 남들에게서도 좋은 점을 찾을 수 있다. 그게 안되면 다른 사람의 잘못된 점만 찾고, 그래야 기분이 좋아진다. 우리는 본래 사랑 그 자체였다. 현대인은 사랑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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