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정보기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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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하늘을 우러러 떳떳한 정치를 표방한 조선은 따로 정보기관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예외를 인정한 분야가 군사였다. 그래서 정보기관원을 뜻하는 용어는 대부분 군사용어다. 정보를 염탐하는 군사를 정후(偵候), 척후(斥候), 원후(遠候)라고 불렀다. ‘후(候)’자는 ‘살피다’ ‘염탐하다’는 뜻이다. ‘엿볼 사(伺)’자를 써서 사망(伺望)이라고도 한다.

 당보수(塘報手), 당보아(塘報兒), 당보군(塘報軍)도 모두 정보군사를 가리키는 말인데, 당(塘)에는 둑이란 뜻이 있기에 둑이 무너지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한자 어원(語源) 사전인 『사원(辭源)』은 당보(塘報)를 ‘긴급 군정(軍情) 보고’라고 적고 있다. 총으로 무장한 정보군사가 당보포수(塘報砲手)다.

 『만기요람(萬機要覽)』 군정(軍政)편 금위영(禁衛營)조에는 ‘국왕이 교외로 거둥해 밤을 지낼 때는 높은 봉우리에 척후를 파송한다’면서 금위영과 어영청이 교대로 파견한다고 적고 있다. 금위영과 어영청 산하에 정보부대가 있었다는 뜻이다. 『동국여지승람』 한성부(漢城府)조에는 백악산, 무악산, 목멱산(남산)에 척후(斥候)가 있었다고 전하고 있으니 남산 정보부의 유래가 오래되었던 셈이다. 『만기요람』의 군사 정원에 대한 기록인 군총(軍摠) 각색군(各色軍)조에는 훈련도감(訓鍊都監) 소속 당보수(塘報手) 73명이 기록되어 있다.

 금위영에는 52명, 북영(北營)에는 4명이 있었으니 중앙 군사기관에는 알려진 것만 모두 129명의 정보군사가 있었다. 『순조실록』 11년(1811) 12월 평안감사의 보고에 따르면 당보군(塘報軍) 및 화병(火兵 : 취사병 또는 소총수)이 44명 있었다. 그러나 숙종 때 서인이던 외척(外戚) 김석주(金錫胄)가 사설 정보기관을 운영해 남인 허새·허영 등을 역모로 몰아 제거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젊은 서인들이 ‘남을 역모로 꾀어 죽인 것은 자신이 역모한 것보다 더 나쁘다’며 반발했다. 급기야 김석주의 공작정치를 찬성하는 노장 서인들이 노론(老論)이 되고, 이에 반대하는 젊은 서인들이 소론(少論)으로 분당되었다.

 정보기관이 민간 정치에 개입할 경우의 부작용은 고금이 같았다. 10일이 국가정보원 창설 50주년인데, 노신영 전 안기부장은 “국가정보기관장이 누구인지 모를수록 사회는 안정되고 정보기관도 잘된다”고 말했다 한다. 국가정보기관은 꼭 필요하지만 그 존재 자체를 국민이 모를수록 훌륭한 조직이 되는 역설적 숙명을 잘 말해 준다.

이덕일 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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