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지? 이 싹수 없는 아저씨에게 내 심장이 벌렁거리는 이유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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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남자, ‘베리머치’ 훌륭하다. 신이 내린 비주얼에 럭셔리한 집과 차. 심심찮게 푼수를 떨어주는 ‘재미진’ 캐릭터에, 서른일곱에 첫사랑이라며 여심을 흔드는 순정까지. 딱 하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킹싸가지’인 점만 빼면 대략 퍼펙트하다. 수목극 시청률 1위로 순항 중인 MBC 미니시리즈 ’최고의 사랑’의 독고진 말이다. 잠깐, 어디서 많이 본 듯한데? ‘띵동!’ ‘꽃보다 남자’(2009) 구준표의 30대 후반 버전이다. 자고로 모든 사단은 여인들의 ‘나쁜 남자’ 사랑에서 비롯되는 법. 언제부턴가 이 땅의 여인들은 모든 것을 갖추고 성품까지 온화한 ‘착한 남자’를 끌어내리고 성질 더러운 ‘나쁜 남자’를 백마에 태워버렸다.

그 첨단에 ‘홍 자매’(홍정은·미란 자매 작가)가 있다. 거의 모든 것이 완벽한 나쁜 남자와 정말 모든 것이 완벽한 착한 남자, 그리고 별 볼일 없는 생활밀착형 여인네의 이야기를 아줌마들이 봐도 흐뭇한 한 편의 순정만화로 엮어냈다. 홍 자매는 대한민국 순정만화사의 산증인인 30대 중후반, 즉 순정만화에 빚지고 살아가는 세대다. ‘쾌걸 춘향’(2005)에서 ‘내 여자친구는 구미호’(2010)까지의 전작들에서 보여준 만화적 상상력과 감수성에 자막과 화면 편집 등 CG 처리로 만화적 형식미까지 집어넣어 만화를 오마쥬했다. 우리가 사랑하는 ‘킹싸가지’의 원형도 사실 순정만화에서 태동한 것이니 캐릭터까지 온전히 만화에서 빌려온 셈이다.

원조 킹싸가지는 구준표, 아니 도묘지다. 1992년부터 2004년까지 장장 12년 동안 일본 만화잡지 ‘월간 마가레트’에 연재되며 순정만화의 패러다임을 바꿔놓은 가미요 요코 원작 ‘꽃보다 남자’의 주인공. 단행본 5800만 부가 팔려 역대 순정만화 판매부수 1위를 기록했고, 국내에서도 대중문화 개방 전부터 해적판이 판치며 소녀들의 판타지를 지배했던 그는 얼굴 되지, 집안 되지, 싸움까지 짱이지만 오직 싸가지만 못 갖췄다. 하지만 연애의 기초인 ‘밀당’도 모르고 대놓고 들이대는 미워할 수 없는 녀석. 어쩌다 꼭 나 같은 평범녀를 사랑하게 되면서 어느새 나만의 수퍼히어로로 거듭나는 도묘지가 구축한 역동적 캐릭터는 그전까지 소녀들의 히어로였던 ‘우수에 찬 부드러운 완벽남’을 서브로 끌어내리고 당당히 주연을 꿰차며 이후 순정만화와 하이틴 로맨스의 주류가 됐다.

국내에서도 ‘궁’ ‘내사랑 싸가지’ ‘그놈은 멋있었다’ 등에서 양산된 수많은 아류들이 2000년대 영화와 드라마를 휩쓸었다. 최근의 ‘시크릿 가든’에 이르기까지 대중문화 속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돼온 ‘싸가지 순정남’ 캐릭터는 이제 그 자체로 고전이 됐다.
고전 패러디가 주특기인 홍 자매는 이를 다시 한번 비틀었다. ‘못돼 처먹어서’ 평생 자기밖에 모르고 살다가 무려 서른일곱에 어이없게 첫사랑을 앓게 되는 ‘아저씨 싸가지’로 변주된 캐릭터는, ‘도묘지’와 함께 나이를 먹고 이제 아줌마란 현실을 살아가는 세대들에게 잃어버린 판타지를 세월의 흔적만 조금 더해 돌려주는 의미다.

CF 한 편으로 10억원을 버는 국민 호감배우 독고진(차승원). 인공심장을 달아서인지 한층 더 까칠한 이 남자의 심박기를 요동치게 한 것은 평범한 우리와 다를 것 없는 생활밀착형에 ‘싼티 더티’ 이미지의 국민 비호감 연예인 구애정(공효진). 독고진이 사랑하기엔 다소 ‘수치스러운’ 존재인 그녀가, 독고진에 전혀 꿀리지 않고 싸가지까지 두루 갖춰 20세기였다면 당당히 주인공이었을 완소남 윤필주(윤계상)의 사랑까지 한 몸에 받게 되지만 결국 독고진을 택할 것임은 모두가 알고 있다. 현실에서라면 ‘편안하고 안전한 필라인’을 택하겠지만 꿈에서나마 ‘지구평화는 됐고 너만 지켜주련다’는 섹시함을 취하고 싶은 여인들의 소망이 바로 ‘도묘지’ 이후 대중문화가 구축한 판타지이기 때문이다.

군식구들 생계를 도맡고 있는 구애정이 밥 먹고 빨래하는 현실적 삶을 살면서, 생활의 흔적조차 없는 모델하우스 같은 저택에서 가족이란 원래 없는 거라는 듯 홀로 이슬만 먹고 사는 독고진의 비현실적 삶의 공간을 드나들며 보안장치를 해제하는 것은 봉인된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통로를 모색함이다. 철저히 캐릭터화된 연기를 펼치는 차승원과 마치 실제인 듯 자연스러운 공효진의 연기가 충돌하는 시공(時空)은 판타지가 열리는 지점. 시도 때도 없이 울려 퍼지는 십여 년 전 유행가풍의 테마송은 판타지 세계를 활짝 열어젖히는 대문이다.

그때 그 시절의 아이콘 핑클쯤이 불렀을 법한 배경음악이 깔리면 왠지 모르게 설레기 시작하고, 상처 난 내 팔뚝을 치료해주는 상냥함보다 상처 낸 ‘그 새끼’를 두들겨주는 터프함에 울렁대는 심장을 발견한다면, 판타지 속에 거하는 싸가지 왕자가 팍팍한 현실을 씩씩하게 헤쳐가야 하는 나에게 아직도 필요한 존재임을 깨닫는다. 현실에선 결코 만날 일 없는 수퍼히어로일지라도.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MBC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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