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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판에 서서 마을을 보네] 3. 끝없는 편력 <15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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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진작에 궤도 이탈을 하여 학교에서 쫓겨난 뒤에 조숙한 환쟁이었던 성진이 덕분에 '딱지'도 떼었으니 뭔가 여자 아이들에게 신비한 구석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는 하여도 남도 방랑과 입대해서 전쟁터를 다녀오기까지 아주 어려운 때가 되면 옆에서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달래줄 그야말로 '여성적'인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고는 했다.

한참 택이와 동굴에서 살며 암벽타기에 몰두했던 무렵이었는데 동화에서 한 여자 애를 알게 되었다. 몸집이 작고 목소리가 가냘프고 눈이 까맣고 큰 아이였는데 나는 몰랐지만 그 애를 좋아하던 다른 녀석이 '방울'이라고 별명을 지어 부르던 것을 나중에 알았다. 사춘기의 감수성이라는 것이 그맘때의 남녀가 모두 비슷하기 마련이라 나는 또래의 계집아이들을 매우 어리게 생각했다. 읽은 책도 '좁은 문' '개선문'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거나 '애수'니 '초원의 빛'이니 아니면 헤르만 헤세, 릴케 부근을 맴돌기 마련이다. 여학생 외투를 입고 단발머리를 한 아이가 동화에서 나오는 나를 뒤쫓아 계단에 서서 불러 세웠다.

-잠깐만요, 이거 잊은 거 아닌가요?

내가 계단에 섰더니 그녀는 천천히 내려왔다. 힐끔 넘겨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양문 문고판 보들레르의 '산문시'를 내밀어 보였다.

-아닌데요.

-옆 자리 아니었어요?

-한 자리 띄어서 앉았던 거 같은데…

아무튼, 하며 그녀는 숨을 몰아 쉬었다.

-갖구 나와 버렸으니 어떡하나?

나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거 싸구려 같은데 그냥 갖지 그러슈.

그리고 길에까지 내려와 버렸는데 그 애도 자연스럽게 계단을 내려와 길에 섰다.

-헌데 어디 가죠?

나는 어리둥절했다. 질문이 당돌했기 때문이다.

-그건 왜 물으슈?

-사실은 나두 지루해서 나왔거든요.

명동 골목은 이제 막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쇼윈도에 불이 켜지고 있었다.

-어디 가서 대포나 한 잔 할까, 생각 중이오.

나는 서른 살 넘은 남자처럼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

-그런데 술값이 꼭 한 사람 몫밖엔 없어요.

-술 내가 살게요.

-어어 여고생이…

-졸업한 지 두 달 됐잖아요?

그림=민정기
글씨=여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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