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픈 프라이스, 부르는게 값 "헷갈려"

중앙일보

입력

서울 용산 가전전문상가 전자랜드21을 찾은 예비신부 김유진(28)씨는 여러 매장을 돌며 가격비교를 시도했으나 헛수고였다. 매장마다 제품에 표시한 가격의 기준이 제각각이어서 헷갈릴 정도였다.

제품에 표시해 놓은 가격과 고객에게 받는 가격이 따로 놀았다. 소비자에게 실제로 팔 때는 다른 조건을 붙여 사실상 값을 올리기도 했고 가격을 깎아주는 곳도 있었다.

지난해 9월부터 공장도가격 표시 의무제가 폐지되고 유통업체가 판매가격을 표시하도록 하는 오픈프라이스제가 시행됐지만 유통업체.소비자 모두가 혼선을 빚고 있다.

공장도가.권장소비자가.판매가 등 복잡한 가격체계를 단일화하고 유통업체가 판매가격을 자율적으로 정해 업체간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소비자에게 혜택을 주자는 취지에서 오픈프라이스제가 도입됐으나 제대로 정착되지 못하고 있다.

김씨는 "혼수비용을 덜어보려고 싼 곳을 찾아다녔으나 매장에 표시된 가격만으로는 단순비교가 어려웠다" 며 "예전에는 적어도 공장도가격처럼 기초정보라도 있었지만 이젠 그마저 없어져 매장 주인이 '부르는 게 값' 처럼 돼버렸다" 며 "소비자가 일일이 흥정을 하기 전에는 실제로 구입할 수 있는 가격을 확인하기는 불가능해졌다" 고 푸념했다.

김씨는 "매장이 실제로 판매하는 가격을 표시해야 소비자가 가격을 비교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지적했다.

전자랜드21에서 29인치 디지털 평면TV(모델명 CT29A7K)의 경우 한 매장은 제품에 표시한 가격(1백16만원)을 '세일가격' 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바로 옆 가게는 1백15만원으로 표시해 놓아 싸다 싶었더니 '배달료는 별도 부담' 이라고 조건을 단다.

다른 매장은 1백18만원이어서 "왜 다른 곳보다 비싸냐" 고 따지자 "표시만 그렇게 했을 뿐 흥정만 잘하면 얼마든지 깎아줄 수 있다" 고 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변역 근처의 전자상가 테크노마트에는 기본적인 가격표 조차 붙여놓지 않는 매장들도 많다.

오픈프라이스제는 TV.VCR.세탁기.오디오.전화기 등 5대 가전품목과 화장품.숙녀복.신사복.운동화 등 12개 품목을 대상으로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매장에서 가격정찰제가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업체마다 주먹구구식으로 판매가격을 책정해놓고 실제로는 다른 가격을 적용해 파는 일이 비일비재해 소비자들의 혼란만 커져 버렸다.

주요 백화점을 찾는 소비자들 역시 오픈프라이스 제도를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가전제품 매장을 직영해오던 롯데.신세계.현대 등 주요 백화점은 공교롭게도 지난해 10월 일제히 가전 메이커에 매장을 내줬다.

가전회사가 백화점에 들어와 영업하면서 가격결정 주체도 제조업체로 바뀌어 오픈프라이스제가 무의미해져 버린 것이다.

한 백화점 관계자는 "대다수 백화점들이 수수료를 5~7%나 물리면서도 가전회사들에게 무리한 가격인하를 요구하는 바람에 일부 백화점엔 메이커가 아예 입점을 거부하는 사례도 있다" 고 설명했다.

신세계 계열 할인점 E마트의 경우 제조업체가 납품가격을 못 내리겠다며 버티는 바람에 물건을 들여오지 못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

E마트 관계자는 "화장품메이커인 로레알이 가격결정권을 넘겨주지 못하겠다고 버텨 결국 구매를 포기했다" 며 "사정이 더 어려운 유통업체들은 가격결정권과 관련한 운신의 폭이 더욱 적다" 고 설명했다.

전자랜드21.테크노마트 등은 아예 가격비교가 힘든 자체브랜드(PB)상품의 비중을 확대하겠다는 전략이다.

테코노마트는 TV.오디오.냉장고 등 PB상품을 조만간 14개 이상으로 늘릴 계획이고 전자랜드21은 자체 매장에서만 따로 주문해 파는 '전용 상품' 의 비중을 20%에서 50%로 높이겠다는 입장이다.

전자업계 관계자는 "유통업체들이 비슷한 시기에 모든 품목을 할인판매할 경우 서로 가격이 당장 비교될까봐 '전면세일' 을 가급적 피하려는 경향" 이라며 "세일기간이나 품목이 겹치지 않는 기획상품 위주의 세일행사가 많아질 것" 이라고 말했다.

표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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