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정신은 민주주의·인권·평화·통일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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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일은 5·18광주민주화운동 31주년을 맞는 날이다. 1980년 5월 18일 광주광역시 전남대 앞에서 벌어진 학생·시민과 계엄군 사이의 충돌이 민중항쟁으로 확대됐다. 79년 말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서거 이후 새로이 권력을 잡으려는 군부 세력과 그에 맞선 민주화 세력이 광주에서 격돌했다. 대결의 정점인 5·18은 대한민국 민주화운동의 큰 봉우리이지만, 유혈의 거대한 비극이었다. 당시 광주 대동고 교사로 5·18 현장을 지켜본 박석무 ‘5·18민중항쟁 제31주년 기념 서울행사위원회’ 명예위원장(전 5·18기념재단 이사장)을 만나 5·18의 어제와 오늘을 이야기했다.

-5·18에 대한 광주, 호남인의 정서가 남다를 것 같다.

 “5·18 정신은 호남에 국한된 게 아니며 호남만 잘 먹고 잘살자는 게 아니다. 민주·인권·평화·통일을 원했다. 10여 일간 수천, 수만 명이 어울려 지내며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논의했다. 5·18 이후 첫 방송에서 시위를 북한 간첩 소행이라고 매도했다. 우리는 통일이 안 돼 이런 일이 난다는 이야기를 하며 시위대가 모이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불렀다. 분단의 비극으로 파악한 거다.”

 -DJ(김대중 전 대통령) 없는 5·18을 생각하기가 쉽지 않은데.

 “5·18 희생자, 유관자, 호남 민중의 정서와 DJ가 통하는 게 있다. 함께 탄압받는 희생자로서의 감정이입이다. 저런 정치인을 통해 우리의 한(恨)과 원(願)을 풀어야 한다, 그런 희망이 80년부터 17년의 노력 끝에 97년 DJ 집권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호남인만으로 DJ 당선은 불가능하다. 호남 출신은 전체 인구의 15% 정도다. 5·18 정신의 정당성에 대한 비(非)호남인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5·18 민주정신이 국민에게 확산된 것이다.”

 -오늘의 시점에서 5·18의 의미를 되새긴다면.

 “5·18 민주항쟁의 모태는 4·19혁명이다. 우리 세대가 고3 땐 4·19에 앞장섰다. 민중이 부당한 정권에 항의하면 이길 수 있음을 보여준 4·19 정신이 5·18로, 다시 6·10항쟁으로 연결되며 한국의 민주주의를 성장시켰다.”

 -87년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를 더욱 성숙시키는 일이 과제다.

 “이번 4·27 재·보선 결과를 보며 선거를 통한 민주혁명이 가능해졌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민중혁명에 대한 어렴풋한 추억이 있었는데, 보통선거를 통한 정치변혁이 일상화된 것이다. ‘거리의 정치’ ‘광장의 정치’를 당장 종식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선거를 통해 더 나은 삶, 복지국가로 가는 게 5·18 31주년을 맞는 우리 사회의 성숙한 모습이자 과제라고 본다.”

 -31년 전 현장에 있었는데….

 “광주 대동고 교사였다. 5·18 이전 나는 세 차례 투옥된 적이 있다. 80년 때 내 나이 39세다. 광주 지역 민주화 운동권 선배그룹에 속했다. 나의 이력상 무관심할 수 없었다. 하지만 딜레마에 놓였다. 이미 요주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적극 가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18일 이후 광주 지역이 ‘시민 공화국’ 상태였기 때문에 시내를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었다. 도청에 들어가 진두지휘까지는 안 했지만 시위대와 상의하고 그랬다. 그때 바로 잡혔으면 죽었을지 모른다. 7개월간 도피한 끝에 붙잡혀 내란방조죄로 1년5개월 옥살이했다.”

 -숨어 지내기가 쉽지 않았겠다.

 “대동고 동료 교사가 나를 숨겨줬다. 그 교사 성이 고씨인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신군부 실세였던 고명승 장군(※육사 15기·전 보안사령관)의 친형이었다. 그 집에 있다 광주를 빠져나와 충청도 아산·온양에서 숨어 지냈다. 잡히면 죽는다는 공포에 시달렸다. 지금도 가끔 잠자다 괴성을 지르곤 한다.”

 -다산(茶山) 정약용 전문가인데, 5·18 정신과 관련이 있을까.

 “다산은 잘못하는 군주나 통치자는 백성의 힘으로 추방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동양 유학의 오랜 전통이기도 한데, 『탕론(湯論)』이란 저술에서 백성의 저항권을 정리했다. 5·18 정신은 그런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60∼70년대 다산의 사상이 널리 유행했고 『탕론』도 70년대 초중반 번역돼 읽혔다.”

 -오늘 우리 사회에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옛날 어진 이들은 ‘결인심(結人心)’ 세 글자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했다. 요즘이 그런 것 같다. 분열된 국민의 마음을 묶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글=배영대, 사진=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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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 다산연구소 이사장

194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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