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16일 새벽 5시 … 남산 KBS에서 5·16 공약문 방송한 박종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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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일 박종세씨가 5·16 당시 첫 방송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김도훈 기자]

KBS 7호 스튜디오에서의 박종세 아나운서. 이 방에서 5·16 첫 방송을 했다.

운명의 기묘한 얽힘이다. 5월 16일 새벽 KBS 아나운서 박종세는 타의(他意)에 의해 역사의 현장에 선다. 그 시절 KBS는 남산에 있었다. TV 방영은 하지 않던 때다. 그는 야간 당직 책임자였다. 박종세(당시 26세)씨는 13일 50년 전을 선명하게 기억했다.

 “그날 새벽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롭습니다. 라일락 꽃 향기가 유난히 진하던 늦봄··· 나는 역사 전개의 한복판에 잠시 있었어요.”

 새벽 4시쯤이었다. 정문 수위가 숙직실에 들어와 소리를 질러대며 그를 깨웠다. 1층 현관으로 내려갔다. 헌병들이 방송국 안에 깔려 있었다. 헌병 책임자가 그에게 다가와서 설명했다. “정체불명의 군인들이 서울로 진격하고 있다. 북괴군 같기도 하고, 여순반란사건 같기도 한데…방송국이 중요해서 지켜주러 왔다”며 부하들을 경계 배치했다.

 상황은 새롭게 전개된다. 10분쯤 후 헌병들은 도망치듯 철수했다. 그리고 5분쯤 뒤 이번에는 얼룩무늬 군복의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주로 공수부대 장병들이었다. 일제히 총을 쏘아댔다. KBS 접수의 돌격명령이었다.

 “귀를 찢는 총성, 군인들의 난입으로 아수라장이었지요. 총구(銃口)가 하늘을 향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는 온몸이 벌집이 되는 것 같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텔레타이프실로 피해 웅크린 채 숨었지요. 밖에서 문을 두드리며 ‘박종세 아나운서 있습니까’ 하는 소리가 들렸어요.”

 -놀라고 긴장하셨겠네요.

 “그런데 그 목소리에 위해(危害)감보다 정중함이 느껴졌어요. 살벌함 속에서도 순간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밖으로 나갔더니 따라오라고 하더군요. 대위 한 명이 기관단총으로 내 등을 쿡쿡 찌르기도 했지요.”

 -바로 박정희 소장을 만나셨다면서요.

 “2층 계단 앞에서 한 장성이 대뜸 ‘박종세 아나운서입니까. 나 박정희라고 하오’ 하며 악수를 청하더군요. 모자의 별 두 개가 유난히 선명히 보였어요.”

 -어떤 기분이었습니까?

 “그 와중에 나를 차분하게 설득하더군요. 위압적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나라가 어지럽소…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우리 군이 일어섰소. 5시 정각에 방송해줘야겠소’ 하면서 전단 한 장을 내밀더군요.”

 전단에 혁명공약이 적혀 있었다. 박종세는 극도의 긴장 속에 난감했다. 기계 조작을 하는 엔지니어가 없었다. 그래서 “엔지니어가 필요합니다. 저 혼자서 방송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엔지니어 색출 명령이 떨어졌다. “군인들이 거칠어지기 시작하더군요. 누군가가 내게 ‘방송 못 하면 당신 죽을 줄 알아’ 하더니 철커덕 권총을 장전합디다.” 박종세는 현기증이 일어나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런데 4시55분쯤 도망쳤던 엔지니어 2명이 돌아왔다. 애국가가 나가고 5시 정각. 행진곡과 함께 박종세는 거사를 알리는 첫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친애하는 애국동포 여러분 은인자중(隱忍自重)하던 군부는 드디어 금조미명(今朝未明)을 기해서 일제히 행동을 개시하여 국가의 행정·입법·사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대한민국 만세! 궐기군 만세!”

 “내 앞에서 박정희 소장이 라디오 방송 장면을 바라보고 있었지요. 장교 2명은 내 뒤에 앉아 권총을 빼든 채 나를 감시했고요.”

 박종세의 목소리는 역사 궤도의 전환을알리는 굉음(轟音)이었다. 그 방송은 대한민국 전체를 격렬하게 엄습했다. 5·16 주체세력은 환호했다. 장면 정권엔 좌절과 절망을 주는 쿠데타였다.

 -공약문을 썼던 JP도 그 현장에 있었지요.

 “검은색 양복, 넥타이를 매지 않은 흰 와이셔츠 차림이었어요. 한쪽 머리칼이 축 처졌고 오른쪽 팔에 카빈 소총을 걸치고 군인들을 지시하는 모습이었어요.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부대장 같은 느낌을 주었어요.”

 -‘은인자중하던…’으로 시작하는 선언문은 문장과 언어 사용의 성향에서 어떻습니까.

 “내가 아나운서인데 쭉 훑어보니 대중에게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격문이었습니다. 과거 정치인들이 쓰던 담론, 관념적 용어를 피하고 주로 실용적·실사구시적 표현이었습니다. 국가 지도층의 언어 구사 측면에서도 대전환이 시작된 겁니다.”

글=배영대 기자
사진=김도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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