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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실감났던 영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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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추규호
주영국 대사

지난 4월 말 영국 왕위 계승 서열 2위 윌리엄 왕자의 결혼식에 대한민국 대사로서 참석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평민 신부 캐서린 미들턴의 웨딩드레스가 아니라, 윌리엄 왕자의 진홍색 육군 예복이었다. 윌리엄 왕자는 현역 공군 장교이나, 이날 입은 예복은 현재 아프가니스탄에 파병 중인 영국군 아일랜드 연대(Irish Guards)의 예복이라고 한다. 30년 전 찰스 왕세자는 현역 장교가 아니었으나, 검정 해군 예복을 입었다. 예복이 다양하게 발달해 있는 영국에서 왜 왕족은 결혼식에서 군복을 입는 것일까.

 영국의 국가지도층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상무정신(尙武精神)을 현양하는 훌륭한 전통을 지켜 왔다. 영국의 왕들은 18세기 중엽 조지 2세 때까지는 전쟁이 일어나면 직접 출정해 귀족들과 함께 진두지휘하는 것을 상례로 했다. 이렇게 지도층이 솔선수범해 공동체를 지키는 전통이 있었기에 영국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뿌리를 튼튼히 내릴 수 있었다.

 영국 사회가 전쟁 희생자들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시하는지를 실감나게 전하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런던에서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함께 많은 구국영웅의 무덤을 안치한 곳이 세인트 폴(St. Paul) 성당이다. 이곳에는 워털루 전투의 영웅 웰링턴 장군, 트래펄가 해전의 영웅 넬슨 제독 등의 무덤이 있으며, 한국전에 참전한 영국군 기념비도 방문자를 맞고 있다. 영국 정부는 이 성당 내에 제2차 세계대전 등에서 영국을 위해 전사한 미군 약 2만8000명을 기리는 소성당을 만들어 놓았다. 여기엔 전사자들의 명단이 수록된 두꺼운 책자가 유리관 속에 전시돼 있다. 지난해 성당 측은 필자에게 이 명부를 매일 한 장씩 넘겨서 전사자들의 이름이 햇빛을 보게 한다고 설명해 주었다.

 다른 하나는 한국전에 참전했던 영국군 용사들이 매년 벌이는 한국전 휴전기념 추모 행사다. 전국의 참전 용사들은 매년 7월 27일이 되면 중부지방 버밍엄시 인근에 소재한 국립 현충원에 모여 전몰자 추모 예배를 보고, 현역 군인 시절과 같은 모습으로 사열과 행진 행사를 연다. 지난해 참석해 보니 머리가 하얗게 센 노병들과 배우자, 가족 등 약 1000명이 모인 엄숙하고 활기찬 행사였다. 특히 영국 정부는 군악대를 특별히 보내 행사를 크게 빛내 주었다. 행사가 끝난 후 참전 용사들이 그날의 행사 전체를 DVD에 수록해 필자에게 기념물로 보내온 것도 인상이 깊다. 올해에도 그들은 어김없이 7·27 기념일에 전국 각지로부터 이 현충원에 모여들어 먼저 간 희생자들을 기리고, 휠체어를 탄 노병까지 참여하는 행진 의식을 펼칠 것이다.

추규호 주영국 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