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청춘은 맨발이다 ⑦ 우리 가족 은인, 박태준 (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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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3년 6월 9일 포항제철 포항1고로에서 첫 쇳물이 쏟아지자 만세를 부르는 박태준 명예회장(가운데). [중앙포토]


박태준(84) 포스코 명예회장은 우리 집안을 일으킨 은인이다. 6·25 당시 우리 집에서 하숙을 한 박 회장은 훗날 박정희 대통령에게 큰 신임을 받았다. 혁명에 동참했지만 박 대통령은 “자네는 경제를 맡아주게. 그리고 혹시 내가 잘못되면 우리 가족을 부탁하네”라며 박 회장을 혁명의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1961년 5·16 이후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 회의의장 비서실장으로 발탁됐고, 68년부터 포항제철 사장으로 경제 재건에 온몸을 던졌다.

 나의 포항 큰형님(강신우 회장)은 당시 포항에서 트럭 6대를 가지고 삼일운수라는 운송업체를 운영했다. 포항의 물건을 떼다 영덕으로 실어 나르는 것이 전부인 구멍가게 규모였다. 당시는 대한통운이 전국을 커버하는 최대 운송업체였다. 어머니가 건설 중이던 포항제철의 박 사장을 찾아가 “우리 아들 도와달라”고 간곡하게 부탁했다. 박 사장은 평소 어머니를 “네짱”(일본어로 누나)이라고 부르며 친밀감을 표시했다.

 박 회장은 지역경제를 살려야 한다며 경북 일원과 포항제철의 물동량을 삼일운수에 나눠주었다. 이 일을 계기로 삼일운수는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며 삼일그룹이 됐다. 포항 큰형님의 성공은 우리 집안에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여기서 처음으로 밝힌다. 내겐 어머니가 두 명이었다. 내 어머니는 대구 사람으로 2남1녀(형과 여동생)를 낳았다. 영덕에 다른 어머니와 세 명의 형님(후에 포항으로 이사가며 포항 형님이 됨)들이 있었다. 아버지는 영덕에서 강제로 결혼했지만 영덕 어머니를 피했다. 대구 농협 지점장을 하면서 함께 근무하던 내 어머니(이하 대구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는 똑소리 나는 인텔리겐치아였다. 아버지의 프러포즈를 받자 “당신은 아들이 있지 않느냐”고 따졌다. 결국 아버지는 영덕 어머니와 이혼하고, 대구 어머니를 호적에 올린 후 결혼했다.

 그럼에도 우리에겐 이복 형제란 개념이 없었다. 나는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방학만 되면 영덕·포항에 가서 살다시피 했다. 영덕 어머니는 무학이었지만 내게 너무 잘해 주셨다. 배다른 형제인 포항 형님들도 대구 오면 대구 어머니에게 도움을 받았다. 내가 양쪽을 왔다 갔다 한 통에 사이가 좋아졌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존심 강한 대구 어머니는 “‘영덕 큰엄마’라고 하지 마. ‘영덕 엄마’라고 불러”라는 다짐을 항상 내게 받았다. 내가 어릴 적 아버지께선 폐결핵으로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그후 경북도청 초대 부녀계장이 됐다. 대구에 어머니의 도움으로 큰 기업을 일군 포항 큰형님은 96년 내가 국회의원에 출마했을 때 현금을 가지고 와 선거운동을 도왔다. 내게 마지막으로 베푼 은덕이었다. 선한 은덕은 이렇듯 돌고 돈다.

 박 회장은 92년 정치적으로 YS와 등지면서 큰 고초를 겪었다. 그해 대통령에 당선된 YS가 93년 포항제철을 압박하자 도쿄 시내 18평 아파트에서 4년간 지냈고, 암 수술을 두 번이나 했다. 내가 포항에서 박 회장을 만날 때마다 산하 사장들은 “신성일씨 자주 오십시오. 덕분에 회장님이 잘 웃으십시다”라고 부탁했다. 워낙 자신에게도 엄격한 분이라 측근들이 박 회장이 웃는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았던 것. 박 회장이 오래오래 건강하시길 바랄 뿐이다.

신성일
정리=장상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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