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Insight] “나일론 백, 프라다 아닌 우리가 원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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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으로 성공한 패션 브랜드의 공통점은 일찍이 세계화에 나섰다는 점이다. 프랑스 브랜드 롱샴도 그중 하나다. 롱샴은 공항을 먼저 공략했다. 1971년 파리 오를리 공항에 매장을 냈다. 지금은 면세점을 앞세운 공항이 백화점 못지않은 쇼핑 장소로 떠올랐지만 당시만 해도 공항은 그저 여행객들이 오가는 교통시설에 불과했다. 창업자인 고(故) 장 카스그랭이 오를리 공항에 매장을 내겠다고 했을 때 주변에선 모두 말렸다. “누가 공항에 가서 여행 가방을 사느냐. 망할 작정이냐”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카스그랭의 예상은 적중했다. 고급스러운 취향을 가진 항공 여행객들은 공항 쇼핑에 흥미를 보였다. 오래지 않아 파리를 통과하는 세계의 엘리트 여행객들은 롱샴의 이름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롱샴은 세계 주요 도시의 공항으로 뻗어나갔다. 1948년 설립된 롱샴은 100여 개국에서 3억2100만 유로(약 5087억원·2010년 기준)의 매출을 올리는 패션 브랜드로 성장했다

 창업자의 아들인 필리프 카스그랭 회장과 손자인 장 카스그랭 사장(할아버지와 이름이 같다)을 지난달 말 홍콩에서 만났다. 카스그랭 부자(父子)는 홍콩의 중심가인 센트럴에 롱샴의 플래그십 스토어를 새로 여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왔다. 이 매장은 아시아에서 가장 큰 롱샴 매장이다. 장 카스그랭 사장은 아시아 시장에 대해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한국 시장을 어떻게 보는가.

장 카스그랭

필리프 카스그랭


 “한국은 롱샴에 매출액 4위의 큰 시장이다. 프랑스, 미국, 일본, 한국 순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나일론 폴딩 백(공식 명칭은 르 플리아주)’으로만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것이다. 롱샴이 가죽 가방, 여행용 가방, 의류, 구두 등 다양한 제품을 구비한 토털 패션 브랜드라는 걸 더 알리는 게 과제다.”

●지난해 매출액은 전년 대비 23% 성장했다. 경기 침체의 영향이 없었나.

 “우리 비즈니스는 (명품 대기업에 비해) 규모가 작고, 목표 고객이 명확하다. 그래서 경기의 영향을 덜 받았다. 일부 명품 브랜드가 타격을 받은 것은 경영, 특히 마케팅 비용에 거품이 있었기 때문이다. 롱샴 같은 가족 기업의 경영 방식이 좀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때가 됐다고 가격을 인위적으로 올리진 않는다. 전통적인 가치, 퀄리티,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탄탄하면서 일관된 정책을 펴면 위기에서도 순항할 수 있다.”

●롱샴 성공의 핵심 비결은.

 “퀄리티와 창의성의 가치를 철저하게 고수한다. 모든 브랜드가 다 그렇다고 하겠지만….(웃음) 우리는 상장 기업이 아니다. 그래서 단기 목표가 없다. 분기별 실적을 내지 않아도 된다. ‘2~3분기 후’가 아니라 ‘다음 10년, 20년’을 생각한다. 이는 중요한 차이다.”

●10년 후 계획은 뭔가.

 “지금보다 롱샴을 세계에 더 알리는 것이다. 아직 보여줄 게 많다.”

●브랜드의 핵심 가치는 뭔가.

 “퀄리티다. 퀄리티를 일정하게 유지하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인다. 사업 규모가 커지면서 제품 생산량을 늘리고 있는데, 동일한 퀄리티를 유지하는 게 관건이다.”

●퀄리티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 전략은.

 “모든 건 사람에게 달려 있다. 제대로 된 훈련이 퀄리티를 만들어낸다. 전체 상품의 3분의 2를 프랑스에 있는 공장 6곳에서 생산한다. 나머지 3분의 1은 튀니지, 모로코, 모리셔스, 중국 등지에서 제조한다. 롱샴은 매우 실용적인 노선을 택했다. ‘메이드 인 차이나’라고 모두 품질이 떨어지는 게 아니다. 제대로 운영할 줄 안다면 중국에서도 충분히 퀄리티 있는 제품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명품 브랜드들은 중국에서 잘 안 만들지 않나.

 “중국에서 만든다는 걸 잘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하는 게 정확하다.(웃음) 많은 브랜드가 중국에서 생산한다.”

●퀄리티를 어떻게 담보하는가.

 “표준을 명확히 제시하고 가이드라인은 매우 구체적이어야 한다. 현지 인력에 생산공정을 충분히 이해시켜야 한다. 어떤 브랜드들은 자체 제조 노하우가 있지 않기 때문에 생산자에게 전수하지 못하는 것이다. 롱샴은 가죽을 다루는 법이나 제품 생산에 관해 ‘뼛속까지’ 알고 있기 때문에 세계 어느 공장에서도 동일한 제품이 나올 수 있도록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 프랑스인이기 때문에 가방을 잘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않느냐.”

롱샴의 전신인 파리의 담배 가게.

고급 송아지 가죽으로 감싼 롱샴 파이프.

애장품인 롱샴 파이프를 들고 있는 로큰롤의 황제 엘비스 프레슬리.

롱샴을 경영하고 있는 카스그랭 가족들. 뒷줄 왼쪽 둘째부터 시계 방향으로 필리프 카스그랭 회장, 미주 담당인 차남 올리비에, 아트 디렉터인 딸 소피, 사장을 맡고 있는 장남 장, 파리 부티크 운영을 맡고 있는 부인 미셸.

롱샴의 상징이 된 나일론 폴딩 백 ‘르 플리아주’. 18년간 1900만 개가 팔렸다.


롱샴은 파리의 작은 담배가게에서 출발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에 주둔하던 연합군 소속 군인들 덕에 장사가 잘됐다. 그런데 전쟁이 끝나고 군이 철수하자 위기가 찾아왔다. 담배와 파이프 판매량이 급감했다. 생존하기 위해선 변해야 했다. 창업자 카스그랭은 “다른 상품과 차별화할 수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변화를 꾀했다. 파이프에 가죽을 덧씌워 고급스러운 제품으로 만들어봤다. 획기적인 시도였다. 다른 가게에서는 볼 수 없는 파이프가 있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가죽 파이프가 히트상품이 됐다. 기존에 없던 차별화한 아이템이 롱샴 성공의 초석을 닦은 것이다. 전 세계 미군 PX를 통해 판매되면서 1960년에 이미 100개국에 수출됐다. 필리프 카스그랭 회장은 롱샴의 혁신 경험을 들려줬다.

●파이프가 핸드백으로 진화한 계기는.

 “처음엔 담배를 넣는 가죽 파우치와 담배 케이스를 만들었다. 점차 세면도구 가방 등으로 넓혀가다가 핸드백과 여행용 가방까지 만들게 됐다. 작은 파이프를 가죽으로 감싸는 작업은 뛰어난 손 기술을 필요로 한다. 파이프보다 훨씬 큰 핸드백을 만들면서 가죽제품의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다.”

 70년대에 롱샴은 제2의 혁신을 단행한다. 나일론이라는 새로운 소재로 가방을 만들었다. 패션업계에서 처음이었다. 가볍고 튼튼한 나일론은 실용적인 소재였다. 때마침 항공 여행이 활성화되기 시작할 때였다. 자동차나 기차로 다닐 때는 인식하지 않던 짐가방의 무게에 사람들이 신경쓰기 시작한 것이다.

●나일론 천으로 만든 가방은 프라다가 원조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당시 프라다는 이탈리아의 한 소매 상점이었다. 여러 브랜드를 함께 팔았는데, 그곳에서 롱샴의 나일론 가방도 팔았다. 내가 나일론 가방을 만들어 미우치아 프라다(이탈리아 패션브랜드 프라다 창업자의 외손녀)의 어머니에게 보여줬더니 마음에 들어 했다. 프라다의 요청으로 나일론 가방을 만들어줬다. 당시 프라다는 스스로 제품을 생산하지 않을 때였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학생이었고, 그의 어머니와 이모가 상점을 함께 운영할 때였다.”

●‘신소재’ 개발은 어떻게 이뤄졌나.

 “나일론 회사에 다니는 친구가 있었다. 그 회사는 프랑스 군에 텐트용 나일론을 납품했다. 카키색의 PVC 소재 천이었다. 한번은 납품이 틀어지는 바람에 나일론 원단이 대량으로 남는 일이 생겼다. 그 원단을 받아와 여행용 가방을 만들어 봤는데, 가볍고 질겨서 실용적이었다. 1969년께였다.”

 나일론 소재는 롱샴에서 가장 큰 부문으로 성장했다. 93년 필리프 카스그랭 회장이 개발한 ‘나일론 폴딩 백’은 1900만 개가 팔리면서 롱샴의 간판 상품이 됐다.

●나일론 폴딩 백은 어떻게 고안했나.

 “좀 편리한 손가방을 만들 수 없을까 고민하다 나왔다. 20여 년에 걸쳐 디자인을 조금씩 바꿔 입구가 크고 지퍼가 일직선인 지금의 모양이 나왔다. 워낙 쓰기 편하다 보니 사모님도 들고, 가정부도 드는 가방이 됐다. 사모님은 (예쁘지만 관리하기 까다로운) 흰색 가죽 소재를, 가정부는 (때가 안 타는) 진한 색 나일론 소재를 고르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나오나.

 “연습이다. 상품에 관한 생각, 스케치를 많이 한다. 또 나는 호기심이 많다. 어려서부터 많이 보고 경험했기 때문인 것 같다. 10대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여행하면서 사업에 대한 눈을 키웠다. 아버지는 내가 열여섯 살 때부터 미국으로, 아프리카로, 일본으로 보냈다. 여행이 쉽지 않았던 1950년대의 일이다.”

●앞으로 풀어야 할 과제는 뭔가.

 “창의적이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생존 그 자체가 최고의 숙제다.”

홍콩=박현영 기자

롱샴 백 디자인하는 모델, 케이트 모스

모델이 웬 디자이너?
중요한 건 헌신이다

케이트 모스가 디자인한 ‘롱샴 케이트모스 라인’의 가방들.


힘없는 눈빛의 깡마른 소녀. 20여 년 전 혜성 같이 등장한 수퍼 모델 케이트 모스(37)는 패션계의 흐름을 바꿔 놓았다. 그의 등장 이후 1980년대를 주름잡던 풍만한 모델들은 가고, 깡마른 소녀들이 무대와 잡지를 독차지했다. 모스가 창조한 창백한 얼굴과 어두운 눈매는 마약 중독자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헤로인 시크’라는 이름까지 얻고 90년대의 스타일 트렌드가 됐다. 거식증 논란이나 마약설이 불거지기도 했지만 모스는 특유의 패션 감각과 스타 기질로 스타일 아이콘으로 자리 잡았다.

 ‘사고 뭉치’ 소녀도 세월의 무게를 이길 수 없는 걸까. 지난달 말 홍콩에서 만난 케이트 모스는 성숙한 여인의 향기를 물씬 풍겼다. 눈가엔 잔잔한 주름이 앉았다. ‘배드 걸’ 이미지는 간데없고 제법 비즈니스 우먼다웠다. 그는 지난해부터 롱샴의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다. 장 카스그랭 롱샴 사장은 모스를 디자이너로 영입한 이유에 대해 “케이트는 오늘날의 메릴린 먼로다. 스타 어필이 있는 패션 선두 주자다. 롱샴과 고객을 연결해줄 수 있는 적임자”라고 말했다. 모스가 디자인한 ‘롱샴의 케이트 모스 라인(Kate Moss for Longchamp)’은 최근까지 세 번의 컬렉션을 선보였다.

●디자이너로 변신한 이유는.

 “디자이너라는 생각은 잘 안 든다. 마크 제이콥스나 존 갈리아노처럼 제대로 그릴 줄 아는 것도 아닌데…. 다만, 오랜 시간 패션업계에 몸담으면서 좋은 스타일 감각과 영감을 얻게 됐다. 디자이너로 활동하기에 앞서 4년간 8차례 롱샴 광고를 찍었다. 롱샴 사람들을 잘 알게 됐고, 자연스럽게 디자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내가 최우선으로 보는 건 ‘사람’이다. 누구와 일하느냐가 내겐 가장 중요하다. 탑샵(영국 패션 브랜드)과도 디자인 협력을 해봤기 때문에 낯설지 않았다.”

 모스와 롱샴의 관계는 끈끈해 보였다. 2005년 케이트 모스가 마약 파문에 휩싸였을 때에도 롱샴은 그녀와의 계약을 파기하지 않았다. 브랜드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가져올 수도 있는 상황인데 말이다. 모스를 모델로 기용한 다른 브랜드들은 계약을 깰 때였다. 장 카스그랭 사장은 이에 대해 “누구나 문제는 있을 수 있고, 더구나 사적인 문제였다”면서 “상장기업이었으면 주가가 하락했을 텐데, 우리는 가족 기업이기 때문에 담대하게 대응할 수 있었고, 지금 그 성과를 보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 JFK 공항에서 픽업돼 모델의 길로 들어섰는데, 어려서부터 모델이 꿈이었나.

 “픽업이 아니라 ‘발견(discovered)’이라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여름 휴가차 뉴욕 공항에 들렀을 때 모델 에이전시 관계자의 눈에 띄었다. 14살 때였다. 아니, 모델이 꿈은 아니었다.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사실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2007년 포브스가 조사한 ‘가장 돈 많이 버는 모델’ 2위에 올랐다. 1년에 900만 달러(약 100억원)를 번 것으로 추산됐는데, 스스로 성공했다고 생각하나.

 “내가 하는 일을 잘하고 싶을 뿐, 유명해지길 원한 적은 없다. 그런데 그냥 내 일을 열심히 하다 보니 부와 인기가 따라온 것 같다.”

●당신의 성공은 단순히 예쁜 얼굴과 아름다운 몸에서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성공의 진짜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나.

 “헌신(loyalty)이다. 나는 치열할 정도로 충실하다, 내 친구들과 내 주변 사람들에게. 비즈니스에 있어서도 물론 그렇다.”

●당대 최고의 디자이너 들과 일해봤는데, 가장 닮고 싶은 디자이너는 누구인가.

 “아주 많다. 이브 생 로랑, 알렉산더 매퀸, 존 갈리아노, 비비언 웨스트우드 등을 좋아한다. 1960년대 활동한 영화배우 줄리 크리스티의 스타일을 좋아한다. 그녀의 히피 스타일은 정말 ‘환상적’이다. 선뜻 소화하기 힘든, 독특한 느낌의 영국식 스타일인데, 나는 그런 기이한 요소가 좋다.”

●디자인에 대한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나.

 “내가 살던 런던의 작은 동네에는 디자이너 옷가게가 없었다. 사람들은 주로 자선 바자 같은 곳에서 한 무더기에 1 파운드쯤 주고 옷을 사다 입곤 했다. 내 어머니는 젊을 때 입던 옷을 많이 갖고 있었다. 70년대풍 옷들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나팔바지 밑단을 잘라 미니스커트로 만들어 입었다. 필요가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 내게 딱 맞는 말이다.”

●직접 디자인을 하나.

 “소피(롱샴의 아트 디렉터)와 컬렉션의 방향이나 내가 원하는 가방에 대해 토론한다. 나는 가방에 물건을 많이 넣어 다닌다. 그래서 가방은 무조건 가볍고, 내구성이 좋고,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내 취향을 제품에 반영한다. 함께 소재를 고르고, 색과 디자인을 정한다.”

●당신이 디자인한 가방은 제법 돈벌이를 하는가.

 “올 가을·겨울 컬렉션 디자인을 막 마쳤다. 컬렉션을 네 번이나 만들 정도면 꽤 성공한 것 아닌가. 제니퍼 로페즈나 앤 해서웨이, 샤를리즈 테론 같은 유명 연예인도 내가 디자인한 가방을 든다.”

●어려서 일을 시작했는데, 스트레스를 다스리는 자신만의 비법이 있나.

 “시골에 집이 있다. 시간 날 때마다 가는데, 그게 내겐 휴식이다.”

●모델을 꿈꾸는 젊은 여성에게 조언한다면.

 “헌신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을 잃지 않는 것이다.”

홍콩=박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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