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선댄스 영화제 단편부문 진출,〈동화〉이지호 감독

중앙일보

입력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가 16년째 운영하고 있는 영화제가 있다. 폴 뉴먼과 함께 출연한 〈내일을 향해 쏴라〉 (69년)에서 자신이 맡은 역의 이름을 딴 선댄스 독립영화제가 그것. 돈은 없고 재능은 충만한 영화학도들을 발굴.지원하기 위해 85년 출범시켰다.

〈펄프 픽션〉의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나 배우 벤 아플, '풀 몬티' 같은 수작들이 '선댄스의 자식들' 중 일부다. 그래서 각 국의 영화학도들은 1월이면 '선댄스의 열병' 을 앓는다. 영화제에서 투자자의 눈에 띄기만 하면 앞 길이 훤히 열리기 때문. 당연히 경쟁도 뜨겁다.

그 치열한 경쟁을 뚫고 단편경쟁 부문에 한국 영화가 처음으로 선정됐다.

2천여편의 출품작에서 50편을 뽑는 '바늘 구멍' 을 통과한 작품은 재미교포 이지호 감독(26)의 〈동화 (A Nursery Tale)〉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소설을 각색한 32분짜리 영화로 이제 막 여성에 눈을 뜬 한 젊은이의 성적 환상을 코믹하게 그리고 있다. 감독이 직접 청년 역을 맡았고 여주인공은 이혜영씨가 무보수로 기꺼이 참여해 줬다고. 李감독은 작년 서울에서 이 영화를 찍었다. 따라서 타이틀에 오르는 제작진은 모두 한국인이다.

그는 이민 4세다. 1908년에 증조부가 프린스턴대학으로 유학가면서 미국에 정착했다. 李감독의 아버지는 7년전 귀국해 현재 시중은행의 이사로 있고 어머니는 화가로 활동중이다. 李감독은 96년 서울에 머물며 음반기획자로 활동한 적이 있다. 이 때 한국에서 영화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그는 오는 6월 하버드대에서 MBA과정을 졸업한다.

"부모님은 내가 법학이나 경영학을 하길 원하셨다. 학부(웨슬리언대학)에서 문학과 철학을 전공한 것도 미국에서는 엄격한 논리학인 법률을 공부하기 위해 기본으로 문학.철학을 먼저 배우기 때문이다."

그가 영화에 눈을 뜬 건 학부때 교환학생으로 1년간 이스라엘에 머물게 되면서. 유명한 다큐멘터리 감독 조셉 크네버를 통해 영화를 만드는 재미에 빠졌다. 미국으로 돌아온 그는 뉴욕대에서 다시 1년간 연출을 공부하며 5편의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모두 호평을 받았다.

"마틴 스코세지 감독을 가장 좋아한다. 〈성난 황소〉 〈좋은 친구들〉 에서 보이는 거친 힘과 에너지 때문이다" .

그는 95년에 '마틴 스코세지 최우수 시나리오 상' 을 수상하면서 평소 존경하던 감독을 직접 만나는 행운을 잡는다. 이를 계기로 클린트 이스트우드.존 워터스 감독 등과도 교류를 터 '한 수' 지도를 받을 수 있었고 이들은 〈동화〉 의 시나리오를 본 뒤 영화화를 적극 권유했다.

그는 상당히 풍부한 영화적 체험을 가진 듯 하다. 〈동화〉 에는 프랑스와 트뤼포.장 뤽 고다르.르네 클레어 등 60년대 프랑스 누벨바그를 이끈 감독들의 영화가 많이 인용돼 있다.

"영화사의 걸출한 감독들에 대한 오마주(헌사)" 라는 것.또 "찻잔 떨어지는 장면은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떠 올린 이미지" 라고 말할 정도로 빼어난 감수성을 느끼게 하는 장면들이 영화 곳곳에서 발견된다.

빈 말이 아니라, 장래를 기대해도 좋을 듯 하다.

"MBA를 따더라도 비즈니스 대신 창작의 길을 걷기로 마음을 굳혔다. 한국에서, 영화로 나의 뜻을 펼쳐 보겠다" .

아직은 서툰 한국말 속에 건실한 청년의 야무진 뜻이 퍼득인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