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료마, TV에서만 뛰어다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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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윤호
경제선임기자

‘료마전(龍馬傳)’. 지난해 일본인들을 열광시킨 NHK의 대하 드라마다. 요즘 국내 케이블 채널을 통해 방영되며 적잖은 인기를 모으고 있다. 원작은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의 역사소설 『료마가 간다』. 도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 말기의 풍운아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1836~1867)의 일대기다. 창작이 가미되긴 했지만 그의 캐릭터는 대단히 역동적이고 반항적이다. 그래서 매력적이다. 드라마의 대사처럼 그는 ‘새로운 일본을 위해’ 목숨을 건 사나이였다. 원래 지명도가 높지 않은 하급무사였지만, 소설을 계기로 일약 일본인들의 히로가 됐다. 일본에선 변혁의 아이콘이다.

  19세기 중후반, 일본은 ‘열혈(熱血)시대’였다. 과장된 각본과 배우들의 오버액션을 보고 말하는 게 아니다. 젊은 피가 변혁을 요구하며 끓어올랐다. 이게 한 방향으로 내달리며 바쿠후 지배의 구각(舊殼)을 깼다. 그 결과가 메이지(明治) 유신이다.

 1960~70년대 고도성장기도 그와 비슷했다. 패전 후 일본은 경제성장에 전력 질주했다. 그때도 에너지가 넘쳤다. 메이지 유신과 경제 부흥, 이를 일본인들은 기적이라고 한다.

 그 바탕엔 일본인들의 훌륭한 자질이 깔려 있다. 치밀함, 집중력, 협동심, 인내력, 예의 바름…. 이런 장점들이 국가적 목표 달성에 집중됐다. 탈아입구(脱亜入歐), 부국강병, 캐치업 등 목표도 명료했다. 큰 목표와 정확한 방향 설정이 있으면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게 일본인이다. 두 차례의 기적도 그 덕분이다. 일본인들의 에너지가 손실 없이 가장 효율적인 타격점인 스윗스폿에 딱 얹혀진 결과다.

 그런데 지금의 일본은 어떤가. 나름대로 정해진 일들을 열심히, 조용히, 차근차근 하고는 있는 듯하다. 대지진 이후 온 국민의 ‘지슈쿠(自肅) 모드’가 일제 가동되는 걸 보면 공동체적 연대의식도 강하다. 이런 식으로 하면 이번 대지진 피해를 극복하는 일이야 시간 문제로 보인다. 일본의 한 TV 여론조사에서 일본이 대지진을 딛고 재건할 것이라는 응답은 94.6%에 달했다.

 그러나 큰 판은 안 바뀌고 있다. 지진 복구와 방사능 누출 대책에 바쁜 와중에도 정치인들은 독도를 놓고 한심한 작태를 보이고 있다. 교과서 왜곡도 겹쳤다. 경제는 ‘잃어버린 20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답답하다. 이 일본이 그 일본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개개인의 질서의식이나 인내심이 뛰어나도 막혀 있는 틀을 깨진 못한다. 외국 언론이 극찬했던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는 규범도 사실은 매우 내향적이다. 그들이 보여준 협동심과 인내심 역시 마찬가지다. 일본인이 만든,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끼리의 룰이다. 그렇기 때문에 과거 이웃 나라를 침략하면서 남에게 폐 끼친다는 생각은 못한 게 아닌가. 툭 하면 나오는 정치인들의 망언 역시 외국엔 대단한 폐 아닌가. 일본인의 행동규범은 개인위생 차원이지, 집단적 의식의 건전성까지 보장해주진 못한다.

 이런 일본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는 현 상태의 일상화다. 현상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체념하고, 참고 견디려는 거다. 안타깝지만 일본인들은 점점 그 쪽으로 빠져드는 모습이다. TV 보는 동안엔 료마에 열광하면서도, 행동은 에도(江戶)시대 서민처럼 하는 건 아닌지. 변혁의 에너지를 느낄 수 없다. 새 길을 뚫고 나가려는 돌파력, 그리고 그 힘을 이끌 용기와 방향감각이 잘 안 보인다. 목적지를 못 찾은 채 길을 헤매고 있다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국가적 에너지가 모이지 않고 부문부문 헛발질과 헛스윙으로 새나가는 건 아닐까.

 최근 니혼게이자이(日本經濟)신문은 ‘세 번째 기적’이라는 특집을 연재했다. ‘잃어버린 20년’에서 탈피해 새 시대를 열자는 취지다. 메이지 유신과 경제 부흥에 이은 또 하나의 기적을 일으켜 보자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료마는 아직 TV나 소설 속에서만 뛰어다니고 있다.

남윤호 경제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