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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Story] Dan Choi “남자를 사랑한다고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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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 아들. 한인 2세.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 졸업. 이라크 참전 군인. 아랍어 통역관. 기독교인 ….

모두 댄 최를 둘러싼 단어다. 그러나 이 앞에 항상 붙는 수식어가 있다. ‘게이’. 댄 최는 동성애자다. 그래서 한때 자신을 부인해야 했고 군대에서도 쫓겨났으며 가족과도 떨어져 산다. 집 없이 전국을 떠돈다. 친구 집 소파에서 자고, 어제 입었던 옷을 오늘도 입지만 ‘행복하다’고 말하는 그다. 게이라서, 게이였기 때문에 미국이라는 국가를 움직일 수 있었던 댄 최(29)를 만났다.

글=이주사랑 프리랜서 jsrlee@gmail.com

그를 처음 만난 건 2010년 초. 뉴욕시 감사원장 존 리우의 설날 행사에서 커뮤니티 공로상을 받던 그였다. 큰 키에 건장한 체구, 굳게 다문 입술. 영락없는 군인이었다. ‘군인이 뭘 했기에 공로상을 받나’ 궁금해하던 순간, 펜을 잃어버린 기자에게 미소와 함께 볼펜을 건네던 그의 모습을 볼 때만 해도 동성애자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잠깐 서서 대화를 나누는데 ‘남자친구’라는 단어가 수없이 나왔다. 그제야 깨달았다. ‘아, 이 사람 게이구나’.

 해가 저물어가던 10월 말, 뉴욕 맨해튼 첼시에서 최씨를 다시 만났다. 반가움에 기자를 와락 껴안은 그의 품에서 따스함이 느껴졌다. ‘게이들의 천국’이라 불리는 첼시라서일까. 군복을 벗고 간편한 티셔츠 차림으로 만난 최씨는 게이도, 군인도 아닌 그냥 ‘댄 최’였다.
 
게이(‘나는 게이다’ 일기장에 쓰고, 찢고, 버리고, 또 쓰고)

●본인이 게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된 건.

 “초등학교 3~4학년쯤이었던 걸로 기억해요. 친구들이랑 TV를 보고 있었는데, 친구들은 ‘저 여자 예쁘다, 좋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난 ‘저 남자 멋지다’라고 생각했어요. 문득 ‘내가 게이’라는 의문이 들었고, 그 뒤로 ‘게이가 되지 않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했죠. 여자를 물체로 봐라, 아무하고나 데이트 해라 등 인터넷을 통해 많은 조언을 찾았고 모두 해 봤지만 안 되더라고요(웃음).”

●결국 받아들이지 않았나요.

 “더 열심히 기도하고, 공부하고… 학교·교회에서도 왕성한 활동을 하려고 노력했어요. 게이들을 보면 ‘뭐야, 쟤네 게이잖아’라고 말하며 ‘난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라고 마음먹었죠. 그러다 보니 ‘자기 혐오’가 자라나더라고요. 내가 너무 싫었고, 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6학년 때 처음으로 일기장에 ‘나는 게이다(I am a Gay)’라고 썼어요. 쓰고선 당황해서 찢어버리고. 또 쓰고, 찢고, 또 썼던 기억이 나요.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 건 대학 졸업하고 나서예요.”

●남자친구는.

 “첫 게이 친구이자 남자친구였던 매튜랑 올 초에 헤어졌어요. 2008년 1월 게이 클럽에서 만나 2년 동안 사귀었는데, 매튜는 ‘게이’에 대해 많은 걸 알려준 사람이지요. 게이들이 좋아하는 음악이 뭔지, 공연이 뭔지, 왜 좋아하는지 등. 주변인들에게는 ‘마사(Martha)’라는 가명으로 알렸죠. 그 얘기를 매튜에게 하니까 ‘왜 하필 그런 촌스러운 이름으로 지었느냐’고 화내더라고요. 지금도 절 용서하지 못한대요(웃음). 제 권익 활동과 연애를 병행하기가 어려워서 헤어졌어요. 지금은 친구로 남았죠.”

●게이로 살아간다는 건.

 “게이로 태어났다는 건 방어적인 태도를 안고 사는 겁니다. 내가 남자에게 호감을 품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내가 왜 다를까’라는 고민을 하면서 자기를 혐오하게 돼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100% 표현하지 않고 성장하지 못하죠. 전 게이들이 사회로부터 ‘정신적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해요. 난 게이로 태어났는데, 사람들은 내게 ‘정상인이 돼라’ ‘정체성을 바꿔라’고 말해요. 파괴적이죠.”

●게이 자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요.

 “왕따(bullying)입니다. 사회 전체는 물론이고, DADT처럼 게이를 이등시민으로 분류하고 있는 법이 보여주듯이 법에서도 게이는 왕따입니다. 미국에서 매일 게이 150명이 자살을 시도하고 2명이 실제로 자살에 성공해요. 최근에 게이 자살 소식이 많이 들려온다고 해서 예전에는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온라인 매체가 성장하면서 게이트키핑(뉴스 결정권자에 의해 뉴스가 취사·선택되는 것)이 어려워지니까 사건이 그대로 드러나는 거예요. 자기를 바꾸려고 노력해보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길 바라던 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요. 그런데 부모들은 자식이 죽었어도 끝까지 그 사실을 부인하고 은폐하려고 하죠.”

목회자 아들 VS 게이(엄마의 소원 ‘매리 코리안 걸’)

●왜 커밍아웃했나요.

 “이라크에서 아랍어 통역장교로 활동했는데, 내가 통역을 하면서 가장 중요하다고 느낀 건 ‘진실’이에요. 이라크에 남은 동료들은 ‘로컬 통역원들을 믿을 수 없다. 빨리 돌아와라’고 아직도 편지를 보내요. 진실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내 성 정체성을 숨기고 있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결심했죠.”

●가족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나요.

 “부모님께서는 캘리포니아에서 목회를 하십니다. 부모님께 커밍아웃한 날, 무기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었어요. 그 언제보다 두려웠죠. 어머니는 만날 입버릇처럼 내게 (어머니 발음 흉내 내며) ‘매리 코리안 걸, 한국 여자랑 결혼해!’라고 말씀하셨어요. 내가 한국 여자랑 결혼하지 않겠다고 하자 어머니는 ‘그럼 어떤 여자랑 결혼할 거냐. 백인 여자는 안 돼’라고 하셨어요. 나는 여자랑 결혼하지 않을 것이고, 난 게이라고 하자 어머니는 ‘게이는 가짜야. 한국 게이 없어. 기도는 해봤느냐’고 하시더군요. 내가 만날 기도했지만 안 되더라고 하자 어머니는 ‘더 기도해! 그냥 한국 여자 아무하고나 자봐’라고까지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 말대로 ‘한국 여자랑 결혼해서 그냥 살다 보면 내가 변할까’라고 생각한 적도 많았어요.”

●지금은 어떤가요.

 “그때 이후 부모님을 뵙지 않고 있어요. 부모님이 내가 게이임을 받아들일 때까지 만나지 않을 생각입니다. 나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난 부모님의 진정한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설명했어요. 간혹 게이들이 부모에게 커밍아웃한 뒤 다시는 ‘게이’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때 부모들은 현실을 부인해 버려요. 부모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자식을 사랑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내가 게이라는 사실을 강하게 밀어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들과의 문제에 비하면 군대 문제는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시안 VS 게이(한인이라는 정체성도 받아들이기 어려웠는데 … )

●왜 ‘군대’를 택했나요.

 “아버지가 군인 출신입니다. 삼촌도 한국전쟁에서 북한군에 잡힌 경험이 있고. 아버지는 항상 ‘군대에 가지 않으면 나중에 어른이 됐을 때 사람들이 너를 존중해주지 않아’라고 말씀하셨어요. 제 성향과도 잘 맞았고, 자연스럽게 웨스트포인트에 지원했죠. 제가 합격했을 때 아버지가 정말 자랑스러워하셨어요.”

 웨스트포인트의 공식 명칭은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다. 졸업과 동시에 육군 소위로 임관되며, 대표적인 웨스트포인트 출신 졸업생으로는 미국 제34대 드와이트 데이비드 아이젠하워 대통령,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등이 있다.

●웨스트포인트에 한인이 많나요.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는데, 당시(1999~2003년) 웨스트포인트에는 아시안 학생이 적었어요. 기숙사에서도, 수업에서도 아시안이 별로 없었죠. 인종 구분란에도 아시안은 없었어요. 미국에서 ‘아시안 남성’ 하면 약하고, 쉽게 양보하고, 정치적이지 못한 이미지잖아요. 뉴스를 봐도 아시안 남성은 찾기 힘들었고. 이걸 바꾸고 싶었어요. 일부러 럭비팀, 크로스컨트리팀에 들어가고 어려운 훈련은 죄다 참여했죠. 사실 그때만 해도 제가 게이라는 건 알릴 생각조차 하지 않았어요. 아시안이라는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데도 오래 걸렸기 때문이죠.”

●아시안으로 미국에서 살아간다는 건.

 “소수계 스트레스예요. 어렸을 때 아버지는 학교에서 친구들이 때리거나 괴롭혀도 절대로 먼저 덤비지 말라고 강조하셨어요. 대신 ‘맞으면 훨씬 더 세게 때려라’고 말씀하시더라고요(웃음). 부모님 영어 발음이 이상해서 부끄러웠던 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외모가 다르기 때문에 내가 아시안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는 없어요. 받아들여야만 해요. 하지만 게이라는 건 숨길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더 혐오하게 되더라고요. 게이는 아시안이라는 집단보다 소수입니다. 게다가 우리는 적의 영역(?)에서 태어나질 않나요(웃음).”

군인 VS 게이(백악관 울타리에 몸을 묶다)

댄 최(왼쪽 둘째)와 동료 군인들이 지난해 4월 미국 백악관 앞에서 동성애자의 군복무 금지법(DADT)에 반대하며 자신들을 백악관 울타리에 묶고 시위하고 있다. [워싱턴 AP=연합뉴스]

●DADT가 드디어 폐지됐는데.

 “역사상 정의를 향한 움직임은 단 한 번도 뒷걸음친 적이 없습니다. DADT도 마찬가지. 권익 운동을 시작한 지 1년반가량, 여기까지 오는 길이 결코 쉽진 않았지만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무엇보다 군인들이 자신의 성 정체성을 당당히 밝히길 바랍니다. 자신을 위해서, 또 게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따지고 보면 불법 행위를 일삼은 것 아닌가요.

 “복무 중에 DADT 시위를 이끌고 샌프란시스코와 뉴욕 게이 퍼레이드에서도 그랜드 마셜(퍼레이드 행진 대표)로 참여했으니 불법 행위 맞죠. 백악관 울타리에 수갑을 차고 시위했어요. 지난해 4월도 마찬가지, 오바마 대통령이 (DADT 폐지를 위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아 백악관 울타리에 사슬로 제 몸을 묶었죠. 7일 동안 단식 투쟁도 벌였습니다. 어떤 위험이라도 감수할 각오가 돼 있었고, 정의를 위해서라면 감옥에도 갈 수 있어요.”

●군에 게이가 많은가.

 “저처럼 아랍어를 구사하는 군인 가운데 DADT로 쫓겨난 사람만 59명이에요. DADT로 한 명이 전장을 떠날 때마다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몫을 나눠야 했죠. 그러니 일이 효율적으로 돌아갈 리 없죠. DADT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법인지, 전장에 있는 사람들은 온몸으로 느껴요. 군대 안에 게이가 상당히 많지만,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오히려 공개적인 게이들을 극심하게 비난하고 억압해요.”

●재입대 신청을 했다고 들었어요.

 (지난해 10월 버지니아 필립스라는 남가주 리버사이드 지방법원 판사가 국방부에 DADT 실행 중지 판결을 내렸다. 며칠 뒤 연방정부가 판결 유보 신청을 했지만 필립스 판사는 이를 기각했다.)

 “DADT 실행 중지 판결이 난 바로 그날 맨해튼 타임스스퀘어에 있는 모병소를 방문해 재입대 신청을 했습니다. 전장에서 삶과 죽음을 사이에 두고 함께 나라를 지킨 동료들이 군대에 있어요. 그들이 그리워요. 게이라고 국가를 사랑하지 않는 것 아니거든요. 또 게이라는 신분으로 군대에 돌아간다는 것 자체가 게이 권익 운동에 앞장서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재입대를 신청했죠. 해병대에 지원하려고 했는데, 나이가 너무 많아서 안 된다고 하더군요(웃음).” 

미국 작년 12월 ‘DADT’ 폐지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22일 워싱턴의 정부 청사에서 동성애자 군복무를 허용하는 법안에 서명하고 있다. [워싱턴 AP=연합뉴스]

오바마 “동성애 군인들, 거짓 삶 벗게 돼”

2010년 12월 22일. 미국의 군(軍) 역사가 새로 쓰였다. 동료나 본인의 성 정체성에 대해 ‘묻지도, 말하지도 말라(DADT·Don’t Ask Don’t Tell)’는 말로 요약되는 동성애자들의 군 복무 금지법이 폐지된 것이다.

 93년 클린턴 정부 시절 제정된 DADT는 지난 17년 동안 ‘게이 군인’ 1만3000명의 날개를 꺾었다. 이라크전에서 활약하고 아랍어에 능숙해도 ‘게이’라는 사실 앞에 그들이 가진 재능은 가리워졌다. 동성애자 권익운동가들은 스스로를 백악관 담장에 묶고 단식투쟁을 하면서 DADT 폐지를 강력히 요구해 왔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이날 DADT 폐지 법안에 서명을 하기 직전 “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워온 동성애자 군인들이 이제 거짓된 삶에서 벗어나게 됐다. 미군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 역사적인 현장을 이끈 사람이 바로 게이 군인 댄 최씨다.

 최씨는 미 육군사관학교 웨스트포인트를 졸업하고 이라크전에 참전해 통역장교로 활동했다. 2009년 3월 미 케이블방송국 MSNBC의 프라임타임 쇼를 통해 자신이 게이임을 커밍아웃(공개)한 뒤부터 최씨는 동성애자 권익운동가로 전국을 누비며 강연·시위·게이 퍼레이드 등에 참석해 전국적인 ‘스타’가 됐다.

 그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군은 결국 지난해 6월, 최씨를 강제 전역시켰다. 그리고 한 달 뒤 최씨는 DADT 폐지 운동에 온몸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또 이를 위해 힘써달라는 뜻으로 자신의 웨스트포인트 졸업반지를 해리 리드 미 상원 원내대표(민주·네바다)에게 건넸다. “DADT가 폐지되는 그날, 반지를 되찾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는 지난해 22일 약속대로 반지를 돌려받았다.

 상원이 표결에 실패하거나 오바마 대통령이 뚜렷한 행동을 취하지 않을 때마다 그는 “리드 의원은 겁쟁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의자에 그 무거운 엉덩이나 붙이고 있으라”고 서슴없이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한 치의 굽힘도 없이 ‘DADT 폐지’를 외쳤고, 미국 언론과 대중은 그의 배짱에 매료됐다.

j칵테일 >> "거듭난 기독교인입니다”

“나는 ‘거듭난 기독교인(born-again Christian)’입니다.”

 종교를 물으니 돌아오는 답변. 최씨의 부모는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에서 침례교 목회자로 활동했다. 그는 엄마 배 속에서부터 교회를 다녔고, 교회에서 바이올린·피아노 등도 연주하고 선교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자랐다. 수요·목요·주일예배는 물론 성가대·성경공부 모임도 절대 빼놓지 않았다. 교회라는 곳은 최씨에게 ‘삶’ 그 자체였으며, 친구들을 사귀며 리더십을 기르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가 동성애자라는 걸 깨닫는 순간 모든 게 달라졌다.

 “사람들은 ‘게이’가 하나님의 뜻에 반(反)한다고 말하더군요. 내겐 종교적 영향이 강하게 배어 있고, 난 예수님이 제일 좋은 멘토이며 롤모델이라고 생각하는데 혼란스러웠어요. 내가 어머니에게 게이라고 밝혔을 때 엄마는 ‘성경에서 돌로 치라 했다’고 말하더군요. 그래서 나를 돌로 쳐 보라고 했어요. 엄마는 ‘너 잘못된 거야. 지옥 갈 거야. 성경에서 그렇게 말했어’라고 했어요. 내 종교를 뺏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요. 마치 내 종교에 ‘강간당한(raped)’ 느낌.”

 주소지가 없어 사실상 ‘홈리스’인 최씨지만 뉴욕에 있을 때면 첼시에 있는 메트로폴리탄 커뮤니티 처치 오브 뉴욕(MCCNY)에 출석한다.

 “가정교회 같은 곳이에요. 여기서 친구들도 많이 만났고, 꼭 기독교인만 오는 게 아니라 유대인·무슬림 등 누구나 환영하는 분위기예요. 예수의 이야기를 가만히 읽어보면 그가 가진 정치적·영적 사고나 그가 이해하는 성경 문구 때문에 그 당시 종교적 리더들, 교회, 로마제국, 정치인들에게 왕따 당했죠. 기존 시스템을 전반적으로 흔들어 놓는 움직임이었어요. 그리고 그는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손길을 뻗쳤죠. ‘radical hospitality’야말로 예수님이 가르쳤던 것 아닐까요.”

현대 사회에도 동성애에 강하게 반대하는 사람이 많다. 동성애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최씨는 이들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한다.

 “동성애 반대자들과 친구로 지내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조건 없는 사랑을 보여줄 필요는 있다고 생각해요. 그들이 생각하는 게 틀렸다고.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건 네가 가진 그 편협한 시각을 극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됐다고. 사랑하기 때문에 지적하는 거라고 말하고 싶어요.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길 바란다고. 따뜻하고 좋기만 한 사랑이 아니라 나를 억누르는 자들에게 오른쪽뿐 아니라 왼쪽 뺨도 들이미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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