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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버그 이빨을 드러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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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세계 최대의 구리·금 광산 ‘그래스버그’는 인도네시아 이리안 자야 지방의 외딴 산 꼭대기에 있다. 이 광산을 운영하는 프리포트 맥모란社(미국 뉴올리언스 소재)는 2000년 1월 1일 인도네시아의 인프라 시설을 제어하는 주요 컴퓨터 시스템이 고장을 일으킬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 자가발전소를 건설했고 45일 분의 연료와 식료품 및 의약품을 비축해 놓았다.

세계 부국(富國)들의 경우 Y2K에 대한 관심은 이제 대비 차원이 아니라 2000년 맞이 축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미국의 조사기관인 가트너 그룹은 미국·유럽·일본이 Y2K 문제 대비에 지출하는 비용이 총 3천억 달러 내지는 그 이상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물론 선진국에서도 일부 컴퓨터 시스템이 2000년을 1900년으로 잘못 인식하는 데서 비롯되는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빈곤 지역의 경우 문제가 심각해 보인다. 그렇다고 Y2K 컨설턴트들이 러시아의 탄도 미사일이 오발되거나 소련이 설계한 원자로가 녹아내리는 등 최악의 사태를 우려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러시아·중국·체코 공화국 등에서는 소프트웨어 수정과 테스팅 절차가 지연되고 있으며 컴퓨터를 업데이트하기 위한 자금도 부족하다. 게다가 아시아 금융위기로 인한 경제난이 사태를 더욱 악화시켰다.

개발도상국들은 2000년이 코 앞에 닥치면서 그들의 컴퓨터 네트워크가 실제로 속수무책이 될 경우에 대비한 비상대책 마련을 서두르고 있다. 일례로 비교적 대비가 잘 된 것으로 보이는 브라질 정부도 2000년을 전후한 과도기에 대비해 소방대와 경찰의 대비태세를 강화하고 軍에 ‘고도 경계’ 태세를 명령했다. 브라질 정부는 또 전화 사용자들에게 올 연말 통화를 최소한으로 줄여줄 것을 당부했다.

브라질의 2000년 프로그램을 책임지고 있는 솔론 레모스 핀토는 “2000년 1월 1일 통화가 되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모든 사람이 수화기를 든다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국무부의 감사관은 최근 의회에서 “52∼68개 개도국이 통신·교통·에너지 부문에서 Y2K 문제를 일으킬 위험성(중간 수위부터 고위험 수위까지)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혼란으로 가장 심한 타격을 받는 곳은 물론 문제가 발생한 나라겠지만 세계 경제에도 파문이 미칠 것이다. 그래스버그 광산이 2주 동안 폐쇄된다고 해서 큰 위기가 닥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전선(電線) 제조 회사들은 구리 값 인상으로 골치를 앓게 될 것이다. 美 중앙정보국(CIA) 로렌스 거슈윈의 말대로 컴퓨터망은 세계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에 Y2K 문제는 개별 국가에 국한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세계적 컴퓨터망을 바탕으로 한 다국적기업들은 이 문제에 대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Y2K 대비 비용이 총 8억 달러에 이르는 제너럴 모터스는 12개의 통제 센터를 설치해 세계 각지의 공장과 4만 개의 주요 공급업체들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감시하고 있다.

Y2K 문제가 정확히 어디서 발생할지 또 그 정도가 얼마나 심각할지 예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대다수 컨설턴트들은 Y2K 준비 상태 평가를 조사에 의존하고 있으며 각국 정부나 국가 기관들은 컴퓨터 개선 노력에 대한 보고를 꺼려왔다. 게다가 가트너 그룹의 루 마르코치오 연구실장이 지적한 대로 Y2K 문제 대부분은 새해를 맞이한 후 몇 주일 또는 몇 달 동안 표면에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마르코치오는 Y2K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간주되는 소프트웨어 중에도 문제가 있는 경우가 10∼15%나 된다고 말했다. 심지어 부국들조차 안심과 우려가 뒤섞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일본의 Y2K 전담반은 일본의 컴퓨터 네트워크는 밀레니엄 버그에 안전하다는 말로 모든 사람들을 안심시켰지만 정부는 국민들에게 새해 연휴를 대비해 식료품과 배터리를 비축해 놓을 것을 권장했다.

빈국(貧國)들의 상황은 더 혼란스럽다. 인도네시아 전력청은 최근 Y2K 준비도를 묻는 한 인도네시아 일간지의 질문에 국민들은 안심해도 된다고 대답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西사모아와 뉴질랜드 및 호주에서 12월 31일 자정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지켜본 후 소프트웨어를 수정할 수 있는 6시간의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중국·인도네시아·중동·북아프리카 등 일부 국가와 지역들은 각종 위험 리스트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Y2K 컨설턴트들은 기업에 어떤 나라들이 가장 취약한가 경고함으로써 큰 돈을 벌어왔지만 정작 그들 국가는 그런 지적에 반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미국의 농산물 회사인 카길社는 최근 남아공에 Y2K 과도기 동안 옥수수와 밀 및 유지종자(피마자·면실 등)의 무역을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남아공을 ‘고위험수위’ 국가로 분류한 가트너 그룹의 보고서가 나온 후 남아공의 Y2K 준비상태를 염려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남아공은 병원과 지방 정부의 컴퓨터 조정 작업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지만 금융 및 무역 분야의 네트워크는 Y2K에 완벽히 대비돼 있다고 주장하면서 격분했다.

정치·경제적 혼란을 겪고 있는 러시아 정부가 전자 시스템의 업데이트를 위해 투자한 돈은 지극히 미미했다. 러시아의 불안한 원자로를 감시하는 컴퓨터망은 서방의 도움으로 Y2K에 대한 준비를 마쳤다. 또 軍 간부들은 탄도 미사일 시스템도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대다수가 노후한 러시아의 컴퓨터 네트워크는 밀레니엄 버그에 취약하며 문제가 발생할 것이 거의 분명하다.

러시아 주재 미국 대사관은 Y2K 과도기 동안 필수 인원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을 철수시키겠다고 본국에 제의했다. 최근 미국 상원의 한 보고서는 러시아가 “금융시장 부문에서 1개월, 각종 시설과 의료보장 부문에서 2개월, 그리고 교통·통신 부문에서 3개월 간의 혼란을 겪을 것”으로 예상했다.

러시아 정부 관리들은 밀레니엄 버그가 러시아를 어둡고 추운 겨울로 몰아넣을 것이라는 우려를 일축한다. 그러나 국가 통신위원회의 알렉산드르 이바노프 위원장은 “많은 정부 기관들이 위험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기관이 보유한 2만8천 대의 컴퓨터 가운데 2000년 대비가 돼 있는 것은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바노프는 러시아가 우선 99년 12월 31일 항공기 운항 편수를 줄이고 위험물질을 사용하는 제조공장의 문을 닫을 것이며,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각종 공장의 가동 체제를 수동으로 전환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에 있는 대다수 다국적 기업은 최악의 경우에 대비하고 있다. CIA와 기업체 간부들은 2000년 1월 초 러시아에 정전과 통신두절 사태가 발생해 몇 주 동안 절전이 실시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러시아의 전력 공급망이 약화될 경우 우크라이나도 곤란을 겪게 될 것이다. 러시아 체제에 연결돼 있는 우크라이나의 전력 체제는 이미 붕괴 위기를 맞고 있다. 러시아는 필요할 경우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력공급 차단을 통해 절전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우크라이나의 전력요금 체납도 부분적인 이유다).

러시아 천연가스 회사인 가즈프롬社도 큰 걱정거리다. 러시아에서 사용되는 에너지의 절반과 동유럽에서 사용되는 에너지의 15%가 이 회사의 천연가스 수송관을 통해 공급되고 있다. CIA에 따르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그리고 중부 유럽과 동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Y2K 문제로 인한 가스 수송관의 효율성 감소로 지역적으로 극심한 가스 부족 현상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가즈프롬의 대변인 겐나디 예조프는 가즈프롬이 Y2K 문제를 “사실상 해결했다”고 말했다. 회사 간부들은 만약 가즈프롬의 컴퓨터가 고장을 일으킬 경우 수동 장비를 통해 비축된 가스를 사용하거나 예비 수송관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일부 빈국들은 Y2K 문제 해결을 위해 자금과 인력을 동원할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세계은행은 Y2K 문제 해결을 위해 7개국에 2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했다(비록 이 금액의 절반은 기술 선진국인 말레이시아에 돌아가긴 했지만). 최근 이 은행은 응급 소프트웨어 지원팀을 요청하는 나라에 파견하고 있다.

절박한 시대에는 필사적인 해결책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중동 어느 도시의 한 Y2K 전문가는 최근 그 도시의 해수 담수화 공장들이 ‘문제 해결 방법을 찾을 때까지’ 컴퓨터의 내부 시계를 1995년으로 돌려놓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중국은 베이징(北京)의 어느 분석가의 말처럼 “Y2K는 외국인들의 문제이니 외국인들이 해결해야 한다”는 태도로 오랫동안 이 문제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러나 2년 전 공산당이 ‘전시(戰時)처럼 긴급히’ 밀레니엄 버그를 퇴치할 것을 명령한 이후 그런 태도는 변했다.

중국 정부는 국영기업과 국가기관들에 대해 정해진 시간 안에 Y2K 문제를 해결하라면서 임무를 소홀히 하는 관리들은 ‘형사처벌’하겠다는 위협까지 했다. 그러나 중국은 출발이 늦어 고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중국이 보유하고 있는 1천만 대의 컴퓨터는 이것 저것 되는 대로 조립한 하드웨어에 해적판 소프트웨어를 끼워넣은 것이기 때문에 버그를 발견하기가 어렵다.

일례로 중국의 은행들은 60개의 서로 다른 제조회사에서 생산한 컴퓨터를 사용하고 있다. 게다가 백업 시스템을 갖춘 네트워크가 극소수이기 때문에 문제점이 발견돼도 수리에 필요한 충분한 시간 여유를 두고 시스템을 종료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꾸준히 노력한 끝에 국가에서 관리하는 컴퓨터 시스템 대부분은 Y2K에 대한 준비를 끝낸 것으로 알려졌다.

Y2K 전망은 1년 전에 비해 밝아졌다. 당시 밀레니엄 버그가 세계적인 경기침체를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했던 도이체 방크의 수석 경제분석가 에드바르트 야르데니는 최근 생각이 바뀐 것 같다. 그는 최근의 한 연구 보고서에서 Y2K 문제는 실제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는 보고서에서 문제가 발생한다고 해도 최악의 경우를 위해 은행에서 여유 자금을 인출했던 소비자들이 “끔찍한 일이 발생하지 않아 한시름 놓았다는 생각에 돈을 전부 써버리는 정도일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Y2K 불황 대신 Y2K 호황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구촌에는 Y2K 문제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 브라질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 가운데 밀레니엄 버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5%에 불과하다. 또 2000년 1월 1일 하늘을 날던 비행기들이 추락하고, 정전과 금융혼란 사태가 발생한다 해도 세계 오지의 주민들은 그런 사실을 눈치조차 못챌 가능성이 높다. 코카콜라社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철저한 준비에 나서고 있지만 수십억 명의 세계인들이 청량음료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물이다. 그들은 우물에서 양동이와 중력을 이용해 물을 긷는다. 그런 것들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끄떡없을 것 같다.

With Owen Matthews in Moscow,
Leslie Pappas in Beijing, Maggie Ford
in Jakarta and Mac Margolis in Rio de Janei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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