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리비아 국영 라디오 "카다피 나팔수 가슴사무치게 후회"

중앙일보

입력

“정부군이 벵가지를 침공하기 시작했습니다. 반정부 시위대와 주민들은 빨리 다른 곳으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19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의 결의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버림받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20일)

“오늘 법원 앞에서 시위가 있습니다. 참가 희망자는 곧바로 모여주세요.”(27일)

리비아 반정부 시위대의 거점 도시 벵가지에 있는 ‘자유 리비아의 목소리(Voice of Free LibyaㆍVFL)’ 라디오 방송국의 활약이다.

VFL 구성인원은 무아마르 카다피 정권에서 나팔수 역할을 했던 국영 방송 직원들. 이들은 불과 한 달 전까지 정부의 녹을 받던 사람들이었다. 아사히신문은 29일 “이들은 42년 만에 언론 자유를 선언했다”고 전했다.

앵커ㆍ편성ㆍ기술 담당 등 14명은 2월 말 ‘반정부 시위대 방송’으로 전환했다. 24시간 체제로 긴급 뉴스를 타전했고 시위대를 응원하는 음악과 연설을 방송했다.

개국 인사말로 “그동안 정권의 선전 활동에 가담하고 있었다는 것이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후회된다”며 “앞으로 시민을 위한 보도만 하겠다”고 다짐했다. 라디오 방송국의 상징은 녹색, 흑색, 적색이 사용된 삼색 깃발을 썼다. 이는 반정부 시위대가 삼색 중앙에 이슬람의 상징인 흰색 초승달과 별이 있는 옛 왕정기를 그려넣은 것과 비슷하다.

리비아 각 지역의 국영 라디오 방송은 한마디 한마디가 검열 대상이었다. 고위급 정부 관리가 사전에 방송 내용을 미리 보고 직접 문구를 작성했다. 앵커는 단순한 전달자 역할만 했다. 편성 책임자인 칼리드 사리(48)씨는 “그동안 카다피를 위대한 지도자라고 허위로 보도했다”며 “너무 부끄럽지만 이제라도 진실을 알리고 싶다”고 말했다. 기술 담당 칼리드 아마리(46)씨는 “지금까진 시민을 배신한 방송국이었다. 이제는 시민을 위해 의무를 다하겠다”고 말했다.

VFL는 이렇게 다짐하고 있다. “시위대는 전장에서 정부군과 싸운다. 우리는 이들을 도와 카다피 정권을 무너뜨리겠다.”

한편 국영TV방송은 “시위대가 마약에 취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혁명의 지도자는 제국주의자들의 공격에 맞서 용감하게 싸운 사람을 승진시키기로 했다”는 등의 내용을 내보내고 있다. 또 일부 국영 라디오 방송은 VFL 주파수와 일부러 똑같은 전파를 사용해 반정부 시위대의 귀를 막으려고 하고 있다.

이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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