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분배 논쟁 일괄 타결할 시점 … 한국은 새로운 사회계약 필요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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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한두 가지 아이디어나 정책으로 될 일이 아니다. 크게 보자. 한국 경제가 클 수 있는 새 판을 만들어야 한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저자 장하준(48·경제학)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는 초과이익공유제 논란에 대해 이렇게 한마디 했다. 그는 새로운 게임의 룰을 찾자고 했다. 중앙일보는 장 교수와 21일 전화로 인터뷰했다.

장 교수는 영국이 아니라 미국 뉴욕에 머물고 있었다. 『…23가지』 미국판 발행을 기념한 저자와의 대화뿐 아니라 강연회·토론회 등으로 여념이 없었다. 인터뷰도 그의 점심 시간을 이용해 이뤄졌다.

- 미국 일정은 언제 끝나는가.

 “10일 정도 일정이다. 미국 여기저기를 들러 뉴욕으로 왔다. 한번 움직일 때 여러 일을 한꺼번에 처리하는 스타일이어서 정신이 좀 없다.”

- 『…23가지』에 대한 외국 반응은.

 “내 입으로 말하기 쑥스럽지만 좋다. 영국에선 이미 1만 권을 넘어섰다. 미국판이 나온 지는 두 달 정도 됐다. 좀 더 지켜봐야겠지만 출판사 쪽은 반응이 좋다고 한다. 그렇다고 한국만큼 폭발적이지는 않다.”

 장 교수는 자랑에 서툰 사람으로 유명하다. 책 이야기를 하는 동안 그의 평소 거침없는 말솜씨는 발휘되지 않았다. ‘시시한 그런 이야기는 끝내고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자’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초과이익공유제 이슈를 꺼내들었다.

- 국내에선 정운찬 전 총리가 말한 초과이익공유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그 말의 뜻이 아직은 분명하지 않다. 취지 못지않게 구체적인 내용도 중요하다. 말이 나오자마자 소모적인 정치적 공방으로 번졌다. 한국 경제상황이 어떻기에 초과이익공유제 논란 같은 일이 벌어지는지는 이야기할 수 있을 듯하다.”

- 지금 한국 경제상황이 어떤가.

 “한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다. 경제의 세 번째 틀이 만들어지고 있다. 구체적으로 빈부 격차를 어떻게 조절할지를 두고 논쟁 중이다. 그러니 논란도 커지고 진통도 겪는 것 아니겠는가.”

- 한국 경제의 틀 어떻게 바뀌어 왔나.

 “외환위기 이전 개발시대엔 (대기업의) 돈 벌 기회를 제한하는 방식으로 빈부 차이가 너무 벌어지지 않도록 했다. 정부가 중소기업 고유 업종을 지정하고 그랬지 않았나. 일본도 대점포법 등을 만들어 대기업이 중소 또는 영세 상인 영역에 쉽게 들어서지 못하도록 했다.”

- 돈 벌 기회를 제한하는 바람에 비효율이 발생해 외환위기를 겪었다는 주장이 있다.

 “그래서 외환위기 이후 두 번째 틀이 만들어졌다. 시장원리에 따르면 모든 사람들이 승자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돈 벌 수 있는 기회에 대한 제약을 없애지 않았는가. 많은 한국인이 정부의 규제, 달리 말해 돈 벌 기회를 제약하지 않으면 나도 잘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래서 대기업의 돈 벌 기회를 제약하는 규제를 없애는 데 많은 사람이 동의했다.”

- 그 기대가 무너졌다는 말인가.

 “돈 버는 제한을 없애보니 빈부격차가 커졌다. 주식과 집값이 오르는 순간엔 ‘기분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금융위기를 겪으며 사람들이 현실을 깨달았다. 빈부 차이가 인내의 한계 이상으로 벌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불만이 커지고 있다. 대중의 불만은 변화의 시작이다.”

 그는 이른바 대형 거품 이후에 나타나는 ‘새로운 게임의 룰 만들기 현상’을 말하고 있었다.

‘전략적 변곡점’이란 말을 유행시킨 제프리 가튼 예일대 비즈니스스쿨 교수는 2007년 중앙SUNDAY와의 인터뷰에서 “역대 주요 거품 붕괴는 대중의 각성으로 이어져 사회책임 요구가 커지는 등 경제의 틀이 크게 바뀌었다”며 “이번 거품 이후에도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각국에서 커질 것”이라고 예고했다.

 장 교수는 ‘통큰치킨’도 거론했다. “한국의 1인당 닭 소비는 미국이나 영국보다 결코 많지 않다. 그런데도 한국만큼 영세한 치킨집이 많은 곳은 없다. 경쟁에 밀려 마지막으로 치킨집을 차린 이들이다. 그런데 돈 벌 기회에 대한 제한이 없어졌다고 대기업이 통닭까지 팔고 나선다니 분통 터지지 않겠는가. ‘당신들은 경쟁에서 졌으니 조용히 있으라’고 말할 수는 없다.”

-초과이익공유제를 하면 그런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정 전 총리가 내놓은 초과이익공유제도 하나의 처방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거 하나 가지고 다 해결될 수는 없다. 얼마 안 가 또 다른 갈등이 불거지고 소모적인 논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 중소기업과 대기업 관계, 통큰치킨 문제, 저출산-고령화 문제 등 주요 현안을 크게 보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 크게 본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한국 경제 성장과 배분의 틀을 새로 짤 필요가 있다. 일괄 타결할 때가 됐다는 얘기다. 새로운 사회계약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다고 돈 버는 기회를 제한하는 쪽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무한 경쟁 체제를 그대로 놔둘 수도 없다. 사회계약을 다시 써야 한다. 그 일은 이미 시작됐다.”

- 한국 재계는 ‘기업 부담만 키운다’며 반발하고 있다.

 “빈부의 차이가 벌어지는 것을, 대중이 분노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면 심각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요즘 브라질에서 가장 수지맞는 비즈니스가 바로 기업인 납치다. 한국 기업인들도 남미처럼 기관총으로 무장한 보디가드의 경호를 받고 출퇴근하고 싶은가.”

- 좀 극단적인 예인 것 같다.

 “갈등의 끝이 그럴 수 있다는 말이다. 기업인들은 경영 차원에서도 새로운 사회계약을 맺는 데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 한국 기업 가운데 세계 시장에서 승리를 자신할 수 있는 곳이 몇 개나 될까. 대부분은 내수가 커질수록 이익이 늘어난다. 내수는 경제적 과실을 폭넓게 나눠 가질수록 커지는 법이다.”

강남규 기자

◆장하준 교수=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사다리 걷어차기』 『나쁜 사마리아인들』 등은 수십만 부씩 팔렸다. 대중적인 글쓰기만 하는 게 아니다. 논문 100여 편을 발표했다. 학술상을 받을 정도로 연구자로서도 명성을 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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