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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오늘, 나는 일본인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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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은 침묵으로 흘려보내라고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가르쳤다. 시인 고은은 일본의 지진·해일과 원전 폭발의 대재앙을 보고 “어떻게 저 무지막지한 재앙에 입 벌려 빈 소리를 낸단 말인가”라고 탄식했다. 일본의 동북 해안지방을 덮친 대재앙 앞에서 누가 빈 소리 아닌 논리적인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의 이웃 일본인들이 당한 참사는 대재앙과 세상의 종말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묵시록(apocalyptic)이요, 극한상황이다. 지진과 해일로 이미 확인된 희생자만 1만 명 이상과 44만의 이재민을 떠안은 일본은 지금 후쿠시마 원자로의 연쇄폭발로 일본인의 상당수가 치명적인 방사능 피해를 입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우리는 지진·해일의 괴력과 원자로 폭발에 경악하고, 그런 극한상황에서도 질서를 지키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일본인들의 의연한 모습에 경탄한다. 50명의 이재민이 열 그릇의 우동을 서로에게 양보하는 저 일본인, 두세 시간 줄 서서 기다린 끝에 편의점에 들어가서도 뒷사람을 위해 물 한 병, 라면 한 봉지만 사는 일본인, 원자로의 냉각에 일본의 운명이 걸린 것을 알고 자진해서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원자로로 달려가는 퇴직 직전의 원전회사 직원, 그런 남편을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힘내라는 말로 격려하는 아내. 그들에게는 영웅적·초인적이라는 말도 훨씬 모자라게 들린다. 통곡하지 않고, 아우성치지 않고, 내 불행을 네 탓으로 돌리지 않는 일본인의 참을성과 시민의식은 감동 덩어리다.

 어떻게 저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어떻게 묵시록적 극한상황에서 남과 공동체를 먼저 생각할 수 있을까. 수학자이면서 일본문화에 조예가 깊은 김용운(단국대) 석좌교수는 일본인들은 고대부터 질서를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고, 나(小)를 축소하고 남은 에너지를 대(大=公)에 바치는 생활방식이 몸에 밴 탓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으로 귀화한 호사카 유지(세종대) 교수는 일본인들의 질서의식의 뿌리를 역사적인 경험에서 찾는다. 그의 설명이다. 일본은 1192년 가마쿠라 막부가 시작되어 1867년 도쿠가와 막부가 끝날 때까지 675년에 걸쳐 무사(武士)정부 아래서 질서를 가치의 핵심으로 알고 살았다. 1470년부터 오다 노부나가가 천하통일을 할 때까지의 100년은 많을 때는 200개의 나라(쿠니)의 무장들이 패권을 다투는 전국시대였다. 전쟁에서는 질서가 생명이다. 그 시대 여성들은 싸움터에 나가는 남편과 아들을 만세로 환송하고 그들이 전사를 해도 남들 앞에서 울지 않았다. 그때부터 일본인들은 불행한 일을 당했을 때 내가 울면 나보다 더 큰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폐가 된다는 생각으로 개인적인 감정의 표출을 자제하는 문화를 정착시켰다. 이와테·미야기·후쿠시마의 일본인들이 세상을 놀라게 할 자제력을 보이는 것도 이런 역사적인 경험에 뿌리를 둔다.

 일본에서는 지금도 초등학교에서 중학교까지 2~3개월에 한 번 재난대책 훈련을 받는다. 그때 학생들이 배우는 것은 위급한 일을 당했을 때 당황하지 말고, 뛰지 말고, 남을 손으로 만지거나 밀지 말고, 흐름(동행들)에서 이탈하지 말고, 쓸데없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개인의 돌출행동은 전체에 피해를 주기 때문에 질서 있는 행동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어릴 때부터 체화(體化)되어 있다.

 호사카 교수는 이런 훈련은 평상시의 생활에도 반영되어 일본에서는 끼어들기가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모두가 조직의 질서를 우선으로 생각한다. 조폭들도 예외가 아니다. 근대 이후 서양에서부터 개별적인 것(개인)과 보편적인 것(국가·사회·공동체)의 이해가 충돌해 왔다. 일본은 멀리는 역사적 경험, 가까이는 교육과 훈련으로 개인과 공동체의 화(和=조화)를 이뤄낸 사회다. 그 ‘화’의 힘이 최악의 위기에 빛을 발하고 있다.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하여 방사능이 대량으로 방출되면 상상하기도 싫은 상황이 올 것이다. 그래도 일본인들은 결국 이겨낼 것이다. 우리는 제2차 세계대전의 폐허 위에 세계 2위의 경제 금자탑을 세운 일본의 복원력을 믿는다. 외상후스트레스를 연구하는 미국의 심리학자들도 대재앙을 겪은 일본이 더 크게 도약할 것이라고 말한다. 온 세계가 일본 돕기에 나섰다. 일본은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오늘 나는 일본인이다”라는 자세로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가능한 지원을 일본에 보내자.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