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문의 검은 돌 흰 돌] 대재앙에 숨죽인 지금 승부가 덧없을지라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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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났던 지난 11일, 도쿄의 일본기원에서 벌어지고 있던 여류명인전 도전기 2국은 56수 만에 중단됐다. 대국은 15일로 연기했다. 그러나 15일 주최사인 산케이 신문은 다시 23일로 연기했다. 일본기원은 이번 주 열릴 예정이던 다른 모든 대국도 무기한 연기했다. 16일 오후 2시쯤엔 규모 5의 지진으로 일본기원 건물이 흔들리고 있다는 메시지가 한국기원에 전해지기도 했다. 미증유의 대재난 앞에서 바둑을 포함한 ‘인간의 게임’들이 숨을 죽였다. 슬픔 가득한 TV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이청용의 멋진 골도 이세돌의 묘수도 그냥 덧없기만 하다. 이기는 건 뭐고 지는 건 뭐냐는 탄식마저 나온다.

  그래도 ‘일정표’는 돌아간다 . 4월 9일 도쿄 일본기원에선 후지쓰배 세계선수권대회가 8일간 열릴 예정이다. 대진 추첨도 이미 끝냈고 한국기사 7명을 포함, 세계 32강이 모이게 되어 있다. 그러나 대회는 예정대로 열릴 수 있을까. 여진 위험과 방사능 누출 문제로 너무 촉박하지 않을까 싶지만 도쿄 시민들 입장을 생각하면 얘기를 거론하는 것 자체가 죄스럽다. 일본기원에 조심스레 문의하니 “다음 주 월요일 답을 보내주겠다”는 답이 돌아온다.

  일본 바둑은 역사가 깊은 탓에 많은 재난과 함께했던 기록이 있다. 일본기원은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불타버려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됐다. 한데 이 같은 재앙은 오히려 3개의 파벌로 나누어져 있던 일본 바둑을 하나로 뭉치게 만들었다. 이때 지어진 새 건물은 2차대전 말인 1945년 5월 미군의 대공습으로 다시 전소됐고 기사들은 대국 때마다 이리 저리 보따리를 싸들고 다녀야 했다. 그런 와중에 히로시마(廣島)에서 하시모토 우타로 9단과 이와모토 가오루 9단이 본인방전 도전기를 벌이게 됐다. 7월 말의 1국은 이와모토 승리. 2국은 천우신조였는지 히로시마 교외로 변경됐다. 8월 4~5일 연속 대국하고 6일 아침 봉수를 개봉하여 막 재개하려 할 때 사건이 일어난다. 당시의 관전기는 이렇게 쓰여 있다.

 “돌연 귀를 째는 폭음과 함께 사방이 연기와 광선에 휩싸였다. 하시모토는 어느새 뜰에 나가 엎드려 있었다. 원자탄이라고 하는 폭탄이 히로시마를 강타한 것이다.”

  당시엔 핵폭탄이 무언지 알 리 없었다. 두 사람은 다시 대국에 들어가 하시모토가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일본 바둑은 가장 어렵던 이 무렵부터 크게 융성하기 시작하여 80년대 초까지 넘볼 수 없는 최고의 모습, 최고의 기량으로 화려하게 꽃핀다. 재난 앞에서 승부란 덧없기 짝이 없는 것이지만 재난 속에서 일어서는 사람의 모습은 참 아름답다. 일본과 일본 바둑이 멋진 모습으로 다시 일어서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박치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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