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586.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제13장 희망찾기(21)

"며칠 갇혀 있지도 않았지만,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졌다가 천지개벽이되어 바깥 세상으로 떠밀려나온 것 같아요. 쉽게 풀려나리라곤 기대조차 못하고 있었거든요. 눈에 보이는 것들은 모두가 소중하게 느껴지네요--. 길가에 쌓인 쓰레기더미까지도."

"쩌그 경찰서에서 면회할 적에 승희씨가 수갑차고 걸어나오는 꼴을 보았을때는 나가 승희씨 손목에 수갑을 채운 것처럼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 올라서 눈 둘 곳을 찾지 못했어라. 시상에 그런 꼴을 나가 왜 봐야 하는지 죽고 싶었지라, 가슴이 덜컥 했어라, 승희씨를 석방시킬 방도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을 때라, 눈앞이 캄캄 했었어라. 그 심덕이 무던했던 활어장수가 우리말을 첫고지 듣고 협조를 해주었고, 청해식당 업주가 수월하게 굴복했기 망정이지, 빤질거리는 놈이였다면, 쇠고랑 벗기 수월치 않았았을 것이어라. 그래서 길가의 쓰레기까지도 좋은 경치로만 보인다는 말은 나도 그럴싸하요이."

"당장 겪고있는 고통보다 장차 기다리고 있을 고통이 더욱 두려웠어요. 티끌처럼 굴러다니는 신세이기 때문에 불쌍하게 여겨줄 사람도 없을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한 사람도 아닌 두 분이나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모처럼 살아볼만한 세상이란 생각도 드네요.

"그 말 듣고보니 가슴이 덜컥 합니다. 우리가 없었으면, 죽을 작정이였어라?""솔직히 말해서 그러고도 싶었지요. 누명을 벗는 길은 유서라도 쓰고 자결하는 길 밖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생각이였어요. 밤낮으로 생각해 보아도 나 혼자서 아니라고 변명하고 발버둥쳐 보았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거든요."

"말같잖은 소리 아예 마시시오이. 승희씨가 거리송장되어 나오는 것을 나가 꼭 봐야 쓰것소? 승희씨가 무고를 당했다는 것을 알게된 이상 나가 무심히 있을 사람이요?"

"그런데 한철규씨는 어디 있어요?""태호라는 사람이나 한선생 일은 이제 그만 잊었뿔시오. 나도 궁금해서 박봉환씨더러 두 사람 행방을 물어 봤소만, 그 사람도 아는 게 없다고 딱 잡아 뗍디다."

"그럼 두 사람이 어디있는지 박봉환씨는 알고 있다는 얘기네요?""나가 세세한 속사정을 어째 알것소."

두 사람의 얘기가 나오면서부터 방극섭의 대꾸가 어쩐 셈인지 퉁명스러워졌다. 고흥 집에 도착하고부터 안면도의 박봉환과 수시로 통기를 주고 받는 눈치였지만, 통화 내막을 승희에게 귀뜸해준 적은 없었다.

물어보면 역증난 목소리로 얼버무리곤 하였다. 승희가 모를 꿍꿍이 속이 있는 것은 분명했으나 승희 역시 탐탁치 않아 아득바득 캐고들지 않았다. 고흥에서 일주일을 지낸 날 저녁 무렵이었다. 한 집에서 기거하면서도 눈이 마주칠 기회를 좀처럼 주지 않았던 방극섭이가 방으로 찾아와 불쑥 한마디 던졌다.

"내일은 산골구경하면서 안면도까지 가봅시다.""산골구경이라니요? 그 동안 장나가는 걸 못봤어요. 바지락 장사는 걷어친 거예요?""집어친 것은 아니지만, 파래나 뜯으며 잠시 숨을 고르고 있다고 봐야것지요."

"산골구경이라니 난데없이 무슨 말씀이세요?""아침에 박봉환씨하고 통화를 했어라. 바쁘진 않으니까 쉬엄쉬엄 오라는 통기가 왔어라. 거그 가면. 태호란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것지요."

그 동안 그녀를 애써 외면했었던 방극섭의 침묵도 달갑지 않았지만, 거두절미하고 안면도에가면 태호를 만날 수있다고 얼버무리는 것에 의구심만 생길 뿐이었다. 무엇 때문에 안면도에서 난장을 벌이려는지, 내막을 알아야 동행하겠다고 버텼으나, 속시원하게 털어 놓지는 않았다. 의문투성이라 하더라도도 방극섭이란 사람이 승희를 업어다 난장 맞힐 사람이 아니라 것에 기대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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