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 Novel] 이문열 연재소설 ‘리투아니아 여인’ 5-6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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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백두리 baekduri@naver.com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함께 있게 되고, 생활의 여러 측면을 같은 시간대에 겪어 나가면서 나는 혜련에게서 전에는 보지 못한 여러 가지 습관이나 특성을 새롭게 알게 됐다. 그중에서도 전에는 아주 추상적이었던 것들이 구체적으로 집혀 오면서,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한 것을 새로 발견했을 때와 같은 놀라움이나 감동에 빠지기도 했다. 선입견이나 억지스러운 간주에 가까운 그녀의 국제성 또는 다국적 문화가 특히 그랬다.

 국제성이나 다국적 문화를 관찰할 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거의 습관적으로 그 상이하고 다양한 것의 종합이나 절충의 효능 같은 유리한 측면만을 주목해 왔다. 그러나 모든 다양성이 그런 종합이나 절충의 효능만으로 만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그 무렵이 아니었던가 싶다.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이질적인 요소의 혼재와 착종으로 상호 고유의 가치와 특질을 훼손하기도 하고, 심할 때는 무의미한 병렬이나 중첩으로 서로를 부정하는 효과만 키워나가는 수도 있다는 것을 그 무렵의 그녀에게서 더러 느낀 적이 있었다.

 정확한 예가 될지 모르지만, 식당에서 느끼는 그녀의 국제성 또는 다국적 문화가 내게 준 충격도 그런 경험 중 하나가 될 듯하다. 그때는 제법 미국 살이 일 년을 넘긴 때였지만, 식탁에서의 편협한 내 기호는 아직도 한식의 풍미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그래서 내 식탁문화 역시 편협하기 그지없었다. 아마도 한국보다 더 풍부하게 한식 재료들을 구입할 수 있는 뉴욕의 한인상가와 차로 얼마간만 달려 나가면 즐비하게 늘어선 한식당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런던 교외로 옮겨앉고, 한식재료가 있어도 취사가 불가능한 호텔 장기체류가 시작되면서 뉴욕에서 누리던 음식호사도 끝이 나고 말았다. 특히 하루의 적잖은 부분이 일반 관광으로 돌려져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닥치는 대로 끼니를 때워야 하게 되면서 나도 어쩔 수 없이 한식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하루 세끼 모두를 외국 음식으로 버티게 되는 경우마저 생기자 갑자기 오기가 솟아 외국 음식에 공격적인 적응을 시도하게 되었다. 되도록 끼니마다 식단의 국적을 바꾸는 게 그랬는데, 그때 가장 자주 나와 동행하게 되는 게 혜련이었다.

 런던에 머문 한 달 동안 나는 적어도 여남은 번은 국적이 다른 식단으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 대부분을 나와 동행한 혜련의 그 방면에 대한 국제성은 실로 놀랄 만한 데가 있었다. 중국, 일본이나 동서 유럽의 대표적 식단뿐 아니라 중남미, 동남아, 지중해 등 어떤 나라의 식당에 앉아도 그녀가 낯설어하거나 알지 못하는 것은 없었다. 이미 원래의 형태나 맛을 알아낼 수 없을 만큼 변형된 요리의 재료뿐 아니라 띄우거나 삭혀 만든 토속적인 조미료부터 나로서는 전혀 짐작도 할 수 없는 향신료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식탁 위에 곁들이는 이런저런 도구에서도 그랬다. 포크와 나이프를 대신하거나 보조하는 도구들은 어떻게 변형되고 대체돼 있어도 그녀는 한눈에 그 용도를 알아보았다. 향신료를 담거나 갈고 혼합하는 용기, 생선의 뼈를 바르거나 갑각류의 껍질을 제거하거나 속살을 파내는 기구 같은 것들로부터 뜨거운 음식을 올려두거나 옮기는 데 쓰는 도구까지, 식탁에 올랐는데 그녀가 용도를 몰라 종업원에게 묻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도대체 언제 세계 각국의 그 많은 요리를 먹어본 거야? 나 같은 건 백 살이 넘도록 살며 돌아다녀도 너만큼 알지 못하겠다.”

 그 방면의 박식과 다문에 놀라다 못해 신기한 느낌까지 든 내가 어느 날 특별히 과장한다는 느낌 없이 혜련에게 그렇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이상한 모양을 한 작은 항아리에 담긴 지중해식 수프를 작은 국자 같은 스푼으로 떠서 맛보고 있던 그녀가 무심한 얼굴로 내 눈길을 받으며 되물었다.

 “뭘요?”

 “지금 이 요리 말이야. 이거 언제 먹어본 거야? 누구와 이 크레타 수프를 먹었지?”

 내가 과장된 놀라움을 그렇게 구체적인 질문으로 바꾸었다. 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이거 오늘 처음인데요. 그렇지만 맛있네요.”

 “그럼, 이 수프에 들어간 생선과 비린내를 없애는 데 쓴 향신료는 어떻게 알았어? 그리고 그 단지와 국자의 용도는 누가 알려줬지?”

 그제야 그녀가 잠깐 소리내어 웃다가 말했다.

 “그런 것들을 모두 배우거나 들어야 아나요? 아까 메뉴에서도 읽었고, 척 보아 알게 되는 것도 있고…. 암튼 지중해 요리로는 미국에서 그리스 식당 한 번 가본 게 전부예요.”

 하지만 그녀의 박식과 다문에 대한 감동은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것이 무의미한 병렬이나 중첩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 것은 얼마 뒤 대영박물관에서 있었던 그녀 쪽의 그 비슷한 물음 때문이었다. 지중해 요리를 먹은 날부터 한 주일쯤 지난 뒤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우리 두 사람만 시간 여유가 생겨 이것저것 재다가 대영박물관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이집트관에서 묘한 반전이 있었다.

 “이집트의 관과 미라가 진열된 곳을 지나 석상들이 늘어선 곳을 돌아보는데, 얼마 전부터 줄곧 석상 발치의 명패에 신경을 쓰고 있던 혜련이 갑자기 내게 물었다.

 “그런데 말예요, 저 사람, 하투셉투튼가 하는 저 여자 왜 저래요? 설명이 좀 이상해요.”

 “뭐가?”

 “뭐야, 저기서는 투트모시스 스리인가 하는 사람의 어머니라고 되어 있더니, 여기서는 숙모라고 되어 있지 않아요? 뭐 잘못된 거 아녜요?“

 “아, 그거? 투트모시스 스리는 투트모시스 삼세 혹은 투트모스 삼세라고 하는 이집트 신왕국 파라오야. 뭐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는 별명이 있는 정복군주지. 람세스 2세와 견주기도 하고. 저 기록, 저것도 틀린 것 같지 않은데. 왜냐하면 하투셉투트 여왕은 그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고모이기도 하니까. 이집트 왕권을 분산시키지 않으려고 남매가 결혼하여 투트모스 3세를 낳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거야. 기록하는 사람이 좀 부주의해서 설명이 모자라거나 통일시키지 못한 탓이겠지.”

 나는 불쑥 던진 물음에 비해서는 지나치리만치 상세하게 대답해 주었다. 어쩌면 혜련의 박식과 다문에 은근히 주눅들어 해온 것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발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무엇 때문인가 잠시 아연해 하는 눈길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작심한 듯 물었다.

 “그럼 말예요. 저 여자, 석상마다 왜 저래요? 좀 전부터 유심히 봤는데, 코가 성한 것보다 깨진 게 더 많아요. 우연일까요? 저기 무슨 사연이 있어요?”

 “그건 어머니 하투셉투트 여왕에 대한 투트모스 3세의 반감 때문일 거야. 투트모스 3세가 어릴 때 파라오인 아버지가 죽자 그녀가 섭정이 되어 이집트를 다스리다가 나중에는 파라오에 올라 이집트를 통치했는데, 투트모스 3세가 성년이 되어도 왕위를 돌려주지 않은 거야. 그녀가 왕위에 있은 것만도 무려 20년이 넘는다지, 아마. 그래서 이래저래 구박을 받다가 어머니가 죽은 뒤에야 왕위에 오르게 되자 그만 투트모스 3세의 분노가 폭발한 거지. 그래서 어머니의 석상을 훼손하고 그녀가 지은 신전이나 기념물들까지 들부수어버렸다고 하더군.”

 이번에도 내가 기다렸다는 듯 길게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더는 물음 없이 전시물들에만 눈길을 주며 걸어갔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내친김이었다. 무슨 열정에선지 그녀를 따라가며 한참이나 더 투트모스 3세 이야기를 했다. 스핑크스를 모래 속에서 찾아낸 전설이며, 정복 전쟁에서의 빛나는 승리 따위. 고백하자면 나는 십대 후반 한때 이집트 역사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는 재미로 그랬던 것인데, 이십 년이 지난 그때 와서야 한번 제대로 쓰인 셈이었다.

 나는 투트모스 3세에 이어 고대 이집트사에서 조금이라도 내세울 만한 것이면 모조리 주워섬긴 것 같은데, 나중에는 서투르게 익힌 히에로그라프로 카르투슈 안에 있는 람세스 3세의 이름까지 읽어내 다시 한번 혜련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게 만들었다. 나는 그게 이집톨로지에 관한 내 박식이 그녀를 감탄시킨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뒤 남은 시간 대영박물관을 건성으로 보고 나온 뒤 들어간 찻집에서 시킨 차가 나오기도 전에 그녀가 불쑥 물었다.

이문열 소설가
일러스트: 백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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