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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방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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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죽기 전에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 선양(禪讓)이다. 혈족에게 물려주는 것이 내선(內禪), 남에게 물려주는 것이 외선(外禪)이다. 『상서(尙書 : 서경)』는 요(堯)임금이 타성(他姓)인 순(舜)에게, 순왕(舜王)도 타성인 우왕(禹王)에게 선양했다고 전한다. 반면 무력으로 폭군을 내쫓는 것이 방벌(放伐)이다. 은(殷) 시조 탕왕(湯王)이 폭군인 하(夏)나라 걸왕(桀王)을 쫓아낸 것이 방(放)이고, 주(周) 시조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죽인 것이 벌(伐)이다.

그러나 선양과 방벌에 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순자(荀子)』는 『정론(正論)』에서 “무릇 요순선양이란 것은 허언(虛言)”이라고 비판했고, 고대 사서인 『죽서기년(竹書紀年)』은 ‘순(舜)이 요(堯)를 가두고 아들 단주(丹朱)도 못 만나게 했다’고 찬탈(簒奪)이라고 전한다. 심지어 『한비자(韓非子)』는 『설의(說疑)』에서 순·우·탕·무왕 4명을 “인신(人臣)으로서 군주를 시해한 자들”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송사(宋史)』 『도곡(陶穀)열전』에는 후주(後周) 병부시랑(兵部侍郞) 도곡이 자기 소매 속에서 후주 임금의 선양 조서(詔書)를 내놓자 송 태조가 야박하게 생각하면서 즉위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도곡은 송나라에서 예·형·호 삼부(三部)의 상서(尙書)까지 올랐다. 조선 초의 권근(權近)이 『천문도지(天文圖誌)』에서 ‘(태조에게) 고구려의 천문도를 바친 자가 있는 것이 천명의 증거’라면서 “선양으로써 나라를 갖게 되었다(以禪讓而有國)”고 주장하고, 세조가 즉위년(1455) 10월 명나라에 보내는 국서에서 ‘단종에게 선양을 받았다’고 주장한 것처럼 대부분의 선양은 사실상 찬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벌은 백성들에게 절대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논리를 제공했다는 가치가 있다.

맹자는 제(齊) 선왕(宣王)에게 “일개 필부(一夫)인 주(紂)를 죽였다는 말은 들었어도 임금을 죽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면서 폭군은 임금이 아니라는 역성(易姓)혁명의 논리를 제공했다. 희발(姬發 : 무왕)은 “신하가 임금을 죽이는 것이 옳으냐”고 말리는 백이·숙제(伯夷·叔弟)에게 “우리를 어루만져 주면 임금이지만 우리를 학대하면 원수(撫我則后, 虐我則讐)”라면서 주왕(紂王)을 죽이고 주(周)나라를 개창했다. 세계 각지에서 방벌(放伐)의 불길이 거세다. 천하의 공물(公物)인 국가를 제 가족 소유(所有)라고 우기던 지구상의 모든 권력이 방벌에 떠는 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