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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션·콘돔·문자, 치유의 예술이 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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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작년 타계한 루이스 부르주아의 2005년 작 ‘무제’. 쿠션을 탑처럼 쌓아 올려 부드러운 여성성을 표현했다.

거대한 청동거미 조각 ‘마망’으로 잘 알려진,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 어린 시절 친언니처럼 지낸 가정교사와 아버지의 불륜에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고, 이후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주요 테마로 삼았다. 그에게 예술은 억압된 여성의 삶에 대한 분노의 출구이자 치유의 과정이었다. 여성적 가치를 저버리는 대신 여성적인 일상이자 가사노동인 바느질 등을 치유의 과정으로 풀어냈다. 천으로 만든 사각 쿠션을 탑처럼 올려 쌓으며, 여성성을 통한 여성의 치유와 구원을 갈망했다.

 데미언 허스트와 함께 영국의 YBA(Young British Artists)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인 트레이시 에민(Tracy Emin). “나의 삶이 예술이고, 나의 예술이 곧 삶이다”라고 말한다. 사적인 일상의 흔적을 전시공간에 그대로 옮겨놓아 센세이션을 일으키는 작가다. 역시 어린 시절 성적으로 학대당한 기억과 상처들을 몇 가지 단어들과 함께 패치워크 형식으로 이어 붙이거나, 때로는 얼룩진 시트, 메모지, 속옷, 사용한 콘돔까지를 전시공간에 옮기는 ‘고백의 미술’을 선보인다.

브루스 나우만의 ‘왁싱 핫(waxing hot)’. ‘HOT’ 글자를 왁스로 닦는 유머감각이 돋보인다.

 서울 강남구 PKM 트리니티 갤러리에서 24일부터 3월23일까지 열리는 ‘텍스트·비디오·여성: 60년대 이후 예술’ 전에는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블루칩 작가들이 모였다. 작가의 아이디어와 제작과정을 중시하며 60년대 이후 서구미술을 지배해온 개념미술의 흐름을 짚어보는 자리다. 1970년대 개념사진의 출현에 한 획을 그은 에드 루샤, 개념미술의 살아있는 전설 로렌스 와이너,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브루스 나우만, 그리고 리처드 프린스·온 카와라·백남준·폴 매카시·댄 그래햄·마틴 크리드 등 스타작가 11명의 작품이 선보인다다. 백남준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내에 첫 선을 보이는 작품들이다.

 텍스트 섹션에는 문자를 아예 회화의 오브제(대상)로 삼은 에드 루샤, 예술의 본질은 의미전달이며 자신의 작업을 ‘언어를 재료로 한 조각’이라 정의하며 타이포그래피에 가까운 작업을 선보인 로렌스 와이너 등이 전시된다. 여성 섹션에서는 강한 여성성을 표현하며 자기 치유적인 작품을 선보인 루이스 브르주아의 2000년대 작품, 대중문화 속에서 성적인 코드로 소비되는 간호사의 이미지를 변주한 리처드 프린스의 회화 ‘세컨 챈스 너스(Second Chance Nurse)’ 등이 나온다. 리처드 프린스의 그림은 지난해 할리우드 영화 ‘월 스트리트’에 나와 유명세를 탔다. 02-515-9496

양성희 기자

◆개념미술=1960년대 이후 서구미술을 뒷받침한 사조. 완성된 결과물이나 작품으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작가의 아이디어 자체와 제작과정을 중시한다. 브루스 나우만은 “오늘날의 예술은 완성된 생산품이 아니라 작가의 활동 그 자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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