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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소·돼지에게 가야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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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가스에 부풀어오른 돼지 사체가 무거운 흙더미를 뚫고 땅 위로 삐져 나왔다. 돼지는 왜 나왔을까. 묻혔으면 그냥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지 왜 나왔을까. 혹시 너무 억울해 이대로는 저승에 갈 수 없다는 비명 아닐까. 소·돼지 330만 마리를 위해 진혼제(鎭魂祭)라도 열어달라는 절규 아닐까.

 소·돼지 330만 마리를 서울 잠실에 풀어놓으면 주경기장·보조경기장·야구장·실내체육관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것이다. 그들 사체의 침출수는 잠실 수영장 여러 개를 채울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짓을 한 것일까. 1월 중순 살처분이 100만을 넘자 이명박(MB)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무리 짐승이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많이 죽여야 하느냐.” MB는 기독교 장로다. 인간과 함께 모든 동물을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성경 구절을 그는 떠올렸을 것이다. 구제역은 MB 5년의 최대 재앙이자 최악의 통치 실패로 기록될 것이다.

 아니 MB 5년 만이 아니다. 5000년 역사에서 이런 일은 처음이다. 오랜 세월 농업국가 한국에서 소·돼지는 공동체의 식구였다. 그런데 그 식구들이 나라를 잘못 선택한 죄로 대학살을 당하고 있다. 구제역을 농림수산식품부 업무 정도로 생각한 국가와 국민 때문에 330만 마리가 끔찍하게 죽어나갔다. 1937년 나치 독일이 스페인의 게르니카를 폭격해 민간인 1500여 명이 숨졌다. 이 참극을 고발한 피카소의 작품이 ‘게르니카’다. 피카소가 살아 있다면 한국판 소·돼지 게르니카를 그릴지 모른다.

 소·돼지 사체 파동은 세상의 맨 얼굴을 보여주고 있다. 전쟁이 없다고 세상이 평화로운 대관령 목장인 건 아니라는 것, 세상은 오히려 병원이며 바이러스라는 걸 사체들은 보여주고 있다. 사체는 말없이 묻는다. 누가 국가의 실존(實存)인가. 구제역 난리통에서도 필요 없는 특위나 만들어 수천만원씩 공짜 판공비를 챙기는 여야 중진 의원들인가 아니면 박봉에 시달리며 소·돼지를 묻는 방역 공무원들인가.

 지도자가 되겠다는 이라면 세상의 맨 얼굴, 국가의 실존을 직시해야 한다. 구제역 파동은 특정 부처나 상임위·지역의 문제가 아니다. 국가적 비상사태요 재앙이다. 그러니 지도자가 되겠다는 사람들은 매몰지에 가서 실상을 목격해야 한다. 박근혜 전 대표는 특히 그렇게 해야 한다. 다음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박근혜는 구제역과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세미나에서 침출수 오염을 우려하고, 미니홈피에서 축산농가를 걱정했으며, 경북도청을 방문한 게 전부다. 그나마 도청 방문은 신년 대구 방문의 일환이었다. 박근혜 사이트에는 구제역이나 소·돼지 얘기는 없다. 1월 1일부터 지금까지 올라온 ‘박근혜 뉴스’ 70건에 구제역 제목은 하나도 없다. 대신 대권만 가득하다. ‘질주, 대항마가 없다’ ‘스마트 정치’ ‘환대…대구 2박3일’ ‘박근혜표 복지정책’….

 박근혜는 “공식 대선 후보도 아닌데 움직이면 국정에 영향을 준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렇지 않아도 적장(敵將)이 “대통령 다 된 것처럼 행동한다”고 공격하는 판에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러나 그럴 거면 지난 연말에 싱크탱크도 발족시키지 말았어야 한다. 싱크탱크 출범은 국민에게 “이제부터 대선 주자로 뛴다”고 선언한 것이다. 선언했으니 행동해야 한다. 물론 모든 사안에 움직일 수는 없다. 그러나 구제역이나 천안함·연평도 같은 국가 비상사태엔 국민 속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박근혜는 매몰지에 가야 한다. 방역복을 입고, 마스크를 쓰고 소·돼지의 무덤으로 가야 한다. 그래서 국가의 실존을 체험해야 한다. 코로는 사상 최악의 악취를, 귀로는 사상 최악의 비명을 기억해 두어야 한다. 지도자는 잔인하게 잘려진 국가의 토막들을 봐두어야 한다. 그런데 박근혜는 아직 천안함 사체도 보지 않았다. 국가라는 실존은 예쁜 인터넷 홈페이지나 수필 같은 트위터에 있는 게 아니다. 들판에 있고, 소·돼지의 무덤 속에 있다.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