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장경은 중국서 베낀 ‘짝퉁’… 원본보다 나으니 훌륭한 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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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넘게 고려대장경을 연구한 오윤희씨. 7일 조계사에서 만난 그는 “고려의 초조대장경은 송나라의 개보대장경을 베낀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고려는 송의 대장경을 계승해 더 진화시켰다”고 말했다. [김도훈 인턴기자]

“올해로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 1000살이 됐다. 이젠 고려대장경을 글로벌한 시각에서 봐야 한다.”

 7일 서울 견지동 조계사에서 오윤희(53·전 고려대장경연구소장) 씨를 만났다. 20년 넘게 대장경을 껴안고 고군분투했던 그가 『대장경, 천년의 지혜를 담은 그릇』(불광출판사)을 냈다. 그는 책에서 “고려대장경은 짝퉁이다”라며 파격 선언을 했다.

-왜 짝퉁인가.

 “고려대장경은 세 종류가 있다. 1011년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을, 1094년께 고려속장경을 조성했으나 몽골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버렸다. 그래서 1236년 다시 대장경을 만들었다. 경남 합천 해인사에 있는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일명 팔만대장경)이다. ‘짝퉁’이란 과격한 용어를 사용한 이유가 있다. 대장경에 대한 우리의 편견과 오해를 씻어내려고 했다.”

-어떤 오해가 있나.

 “우리는 고려대장경에 대해 과도하게 포장된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그걸 걷어내야 고려대장경의 현대적 의미를 더 깊고 정확하게 짚어볼 수 있다. 대장경은 중국 송나라 때 처음 만들어졌다. 개보대장경(開寶大藏經·971~982)이다. 고려 초조대장경은 그걸 글씨체까지 베낀 것이다. 해인사 팔만대장경도 초조대장경을 베낀 것이다. 글씨체도 중국의 글씨체다. 역사적 사실이다.”

-고려대장경이 중국 대장경의 복사품에 불과한 건가.

 “그렇진 않다. 있는 그대로 보자는 거다. 그럴 때 고려대장경의 실질적 가치를 알게 된다. 베꼈다고 부끄러워할 것은 없다. 그걸 바탕으로 더 진화시켰다. 대장경은 고려만 만든 게 아니다. 송나라,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일본 등 모든 왕조가 대장경을 새겼다. 우리가 오랑캐라고 불렀던 나라에도 대장경이 있었다. 그런데 송나라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목판 대장경을 만든 게 고려였다. 대단한 사건이다.”

-왜 대단한가.

 “삼성이 만든 스마트폰과 태플릿PC는 뛰어나다. 그런데 삼성이 최초로 스마트폰을 만든 것은 아니다. 대장경도 그런 식이었다. 송나라에서 먼저 만들었다. 고려는 이를 계승· 발전시켜 더 진화된 물건을 만들어냈다. 송의 대장경을 베낀 것은 오히려 실용적인 선택이었다. 고려의 대장경은 송의 대장경보다 오류도 적고, 교정과 구성이 매우 뛰어나다. 요즘 말로 디자인 파워와 편집 파워가 있었던 거다. 고려의 문화적 저력이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송나라 대장경을 보면 어려운 한문이 띄어쓰기도 없이 빽빽하게 들어가 있다. 고려대장경은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모양을 조금씩 바꾸었다. 내용을 베끼면서도 목차를 집어넣고, 목차를 한단 내려서 편집을 하고, 이런 과정을 거친 고려대장경은 보기에 훨씬 시원시원하다. 또 하나의 창조였다.”

-단순한 편집이었나.

 “송나라 대장경은 한 권당 500~1000자씩 틀린 게 있다. 고려대장경의 오류는 이보다 훨씬 적다. 비판적 시각에서 편집을 했던 거다. 저명 불교학자인 로버트 버스웰(UCLA 아시아언어문화학과) 교수는 ‘인류사에서 일찍이 없던 기술이다. 르네상스기 사상가였던 에라스무스는 이걸 ‘크리티컬 에디팅(Critical editing·비판적 편집)’이라고 불렀다. 고려대장경의 크리티컬 에디팅은 서구보다 200년이나 앞섰다’고 말했다. 한국이 하루아침에 IT강국이 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고려대장경을 만든 그런 지적인 유전자가 우리 몸 안에 흐르기 때문이라고 본다.”

-동아시아 각국에서 앞다투어 대장경을 만든 까닭은.

 “대장경은 국력의 상징이었다. 중국도 왕조가 바뀔 때마다 대장경을 새롭게 만들었다. 불교 경전이 집성되고 전래되는 역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당시 불교 경전은 최고의 선진문명이었다. 각국은 이것을 장악하려 했다. 대장경은 당시 가장 첨예한 선진문명의 헤게모니, 즉 주도권에 대한 상징이기도 했다.”

-거란·몽골의 외침을 물리치기 위해 고려대장경을 만들었다고 알고 있다.

 “그건 부분만 보는 거다. 이젠 더 글로벌한 시각에서 봐야 한다. 대장경은 어느 한 나라가 홀로 만든 게 아니다. 동아시아 각국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만든 거다. 아시아의 지식문화가 있었는데 거기서 고려가 이런 역할을 했다는 식으로 봐야 한다. 글로벌한 흐름 속에서 대장경을 보는 거다. 불교는 어차피 글로벌 문화다.”

-결국 대장경은 무엇인가.

 “말씀에 대한 기억이다. 2500년 전 부처님의 말씀, 그 말씀에 대한 기억을 담은 그릇이다. 처음에는 부처님의 시자(侍者)였던 아난의 암송력이었다가, 문자를 기록한 나뭇잎이었다가, 종이였다가, 다시 목판으로 인쇄됐던 거다. 말씀은 그대로지만 담는 그릇은 계속 바뀌었다. 고려대장경 이후 다시 1000년이 흘렀다. 지금 시대도 새로운 그릇을 필요로 한다. 바로 디지털이다. 2006년 ‘디지털 대장경(http://kb.sutra.re.kr)’을 만든 이유다.”

글=백성호 기자
사진=김도훈 인턴기자

◆고려대장경=거란의 침략을 맞아 고려 현종 2년(1011)에 새기기 시작한 목판 대장경이다. 모두 1500종의 문헌, 5200만 자가 수록돼 있다. 두루마리 책에 인쇄하면 6000권 분량이다. 이후 고려속장경(1094년께)도 만들었다. 그러나 외침으로 둘 다 불타버렸다. 현재 목판은 없고, 종이에 인쇄된 일부만 일본 교토의 남선사 등에 소장돼 있다. 이후 몽골의 침략에 맞서 재조대장경(1236~51)을 조성했다. 그게 경남 합천 해인사에 있는 6798권 규모의 팔만대장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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