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예나 지금이나 관통하는 의는 같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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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덕일
역사평론가

지금 처음 일어나는 일이지만 과거에 이미 있었던 일의 반복 같은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때문에 앞선 수레바퀴란 뜻의 전철(前轍)이 역사란 의미로도 쓰이고, 앞의 수레가 뒤집히는 것을 보고 뒤의 수레가 경계한다는 복거지계(覆車之戒)가 나왔다. 『장자(莊子)』 ‘외편(外篇)’에 나오는 고금불이(古今不二)처럼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는 예나 지금이나 같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도 ‘전도서’에서 ‘해 아래 새것이 없다’면서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 오래 전 세대에도 이미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앞의 수레가 엎어진 것을 보고서도 인간이 다시 그 길로 접어드는 이유는 이(利)에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자(孟子)』 첫머리가 맹자와 양(梁) 혜왕(惠王) 사이의 이(利)와 의(義)에 대한 대화로 시작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하남·섬서·산서성 등지에 걸쳐 있던 위(魏)나라는 서쪽 강국 진(秦)에 쫓겨 대량(大梁:현 개봉)으로 천도한 후 양나라로도 불렸다. 패권을 위해 절치부심하던 양 혜왕이 맹자에게 “선생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우리나라에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맹자는 “왕께서는 하필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오직 인과 의가 있을 따름입니다”라고 답한다. 『사기(史記)』 ‘삼왕세가’에 나오는 ‘고금통의(古今通義)’는 예나 지금이나 관통하는 의는 같다는 뜻이다.

의(義)는 원칙, 이(利)는 편법이기도 하다. 『태종실록』 5년 6월조에는 경처(京妻:서울에서 얻은 부인) 강씨 소생의 어린 아들을 후사로 세우려는 이성계에게 배극렴(裵克廉)이 “적장자를 세우는 것이 고금에 통하는 의리입니다(古今通義)”라고 말하자 이성계가 좋아하지 않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태조가 적장자를 세우는 원칙을 버리고 사적 총애라는 편법을 선택한 결과 제1차 왕자의 난이 발생했다. 『세종실록』 11년 4월조에서 사간원이 “벼슬로써 공을 보답하고 벌로써 악을 징치하는 것이 고금통의입니다”라고 말한 것도 국가경영의 원칙을 천명한 것이다.

이(利)는 누구나 바라는 것이지만 이를 보고 의를 잊는 견리망의(見利忘義)에 수레가 엎어진다. 그러나 내가 탄 수레만은 엎어지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항상 많았고 세상은 늘 시끄러웠다. 그래서 공자가 “이를 보거든 의를 생각하라(見利思義)”고 경계하지 않았던가.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도 고금통의에 비추면 엎어지지 않을 길이 보이리라.

이덕일 역사평론가

이덕일 칼럼 주 3회 연재

역사평론가 이덕일씨의 칼럼 ‘고금통의(古今通義)’를 오늘부터 주3회 연재한다. 그는 지난해부터 중앙SUNDAY에 ‘이덕일의 사사사(事思史)’ (조선왕을 말하다)를 집필해 왔다.

이덕일은 ‘역사 글쟁이’다. 오래돼 흥미를 끌기 어려운 역사라도 그의 손에 들어가면 술술 읽히는 이야기로 변한다. 필력이 좋고 역사적 상상력도 돋보인다. 그는 역사를 서재와 상아탑 안에서 대중 앞으로 끌어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저서도 무려 20권이 넘는다. 우리가 알지 못했거나 잘못 알았던 것에 대한 도전이다. 그러다 보니 논란도 양산한다. 그는 정조는 독살당했고, 십만양병설은 지어낸 이야기라고 주장한다. 한국사의 중요한 논란거리 중 하나인 한사군(漢四郡) 위치에 대해서도 그의 판단은 다르다. 낙랑군이 만주 서쪽(요동)에 있었다고 확신한다.

그의 도발적인 글쓰기에 대해 주류 사학계는 이단(異端)이라고 몰아붙인다. 하지만 그는 기존 한국사는 식민사관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에 이를 깨뜨려야 한다고 맞선다. 지금껏 우리나라 사학계는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에 젖은 전문가만 인정해 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한국사 전문대학원을 설립해 식민사관에서 벗어난 신주류 사학을 체계화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

◆약력=61년 충남 아산 생, 숭실대 사학 박사, 2009년 조만식숭실언론인상 수상,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