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novation _ 기업의 창조습관] ‘조짐’에 예민하게 대응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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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6월 처음으로 애플 아이폰을 구입한 소비자가 환호하고 있다. 스마트폰 열풍을 예고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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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연구팀이 서울 지하철의 이용 행태를 조사해 사람들의 행동이 일정한 범주에서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것을 알아냈다. 이 연구팀은 수도권 지하철 승객을 ‘도심형 개미’ ‘도심형 베짱이’ ‘융합형’ 세 가지로 구분했다.

소비자 습성 변화가 ‘창조’의 열쇠 … 아사히 맥주와 코치의 성공 비결

도심형 개미는 집과 회사 또는 학교만 오간다. 퇴근 시간은 오후 6시 이후며 대개 7∼8시에 집에 도착한다. 수도권에 사는 직장인과 학생 중 45%가 도심형 개미다. 도심형 베짱이와 융합형은 회사나 학교가 끝나면 강남역이나 신촌역 또는 홍대입구역과 혜화역으로 몰린다. 유흥가와 각종 학원이 있어서다. 이들은 개미보다 평균 한 시간 정도 일찍 퇴근한다. 이들 중 지하철을 타고 집에 귀가하면 융합형, 늦게까지 놀다 지하철 막차를 놓쳐 택시로 귀가하면 베짱이형이다. 직장인과 학생 중 베짱이형은 38.5%, 융합형은 16.5%로 나타났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활공간은 수많은 습성으로 구성돼 있다. 날마다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살 것 같지만 사람들은 일정한 행동의 틀 속에서 살아간다. 이런 생활공간에서의 습성을 이해하면 창조를 이끌어 낼 수 있다.

최근 카드 업계는 고객의 습성을 이해한 서비스를 내놓기 시작했다. 단순히 기름값이나 영화비 또는 외식비를 깎아주던 과거의 방식이 아니다. 현대카드와 씨티은행은 버스와 지하철과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건당 100~200원씩 할인해주는 서비스를 내놓았다. 이런 서비스는 도심형 개미나 융합형의 생활습성을 이해하지 않으면 내놓기 어려운 것들이다. SC제일은행은 ‘타임카드’라는 서비스를 내놓았다. 직장인의 일상적 동선을 고려해 내놓은 것이다. 직장인의 경우 오전 6∼9시 사이에는 편의점이나 제과점에 들러 간단한 식사를 한다. 이때 타임카드를 쓰면 10% 할인을 받을 수 있다. 낮 12시∼오후 2시 사이에는 점심값과 커피값을 각각 10%, 20% 깎아준다.

어! 소비자 입맛이 변했네
습성은 상당 기간 지속되는 특성이 있다. 그렇다고 고정불변은 아니다. 세상이 바뀜과 함께 습성도 바뀐다. 아사히 맥주는 기린맥주에 밀려 한동안 고생했다. 이를 뒤집은 것이 1987년에 출시된 ‘수퍼드라이’다. 그동안 아사히는 식생활이 바뀌면 맛에 대한 습성도 달라짐을 알지 못했다. 아사히는 늦었지만 고객의 입맛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아보기 위해 5000명에 이르는 소비자를 조사했다. 그 결과 맥주 맛에 대한 소비자의 습성이 바뀌어 있었다. 이들은 맥주를 마셨을 때 넉넉하고 풍요한 미감에 익숙해져 있었다. 그리고 맛이 산뜻하고 정갈할수록 좋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이 조사를 바탕으로 아사히 맥주는 1986년 ‘고쿠기레 맥주’를 출시했고 다음 해 다시 개선해 내놓은 것은 수퍼드라이다. 이 제품으로 아사히는 기린을 다시 앞설 수 있었다. 맛은 어떻게 길들여졌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일종의 습성이다. 외국인이 한국의 김치를 먹기 어려워하는 것도 매운맛에 길들여져 있지 않은 그들의 습성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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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수만 명의 소비자 습성을 분석하는 것으로 유명한 코치사의 루 프랭크포트 회장.

생활 습성에 기초한 창조는 생각보다 쉽다. 분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 가격의 럭셔리’ ‘럭셔리의 민주화’. 이들 문구는 2000년 미국의 코치라는 회사가 럭셔리 업계에 던진 화두다. 고급이지만 부담을 주지 않는 가격의 럭셔리 제품을 판매하겠다는 전략으로 코치는 1979년 매출 600만 달러의 기업에서 2009년에 36억 달러의 기업으로 변모했다. 이 대변신을 이뤄낸 사람은 루 프랭크포트 회장이다. 비밀은 분석 경영에 있었다.

패션은 직관이 중요한 산업이다. 하지만 그는 지독하게도 분석을 신봉하는 숫자 박사다. 그는 신제품 개발에 대한 의사결정을 할 때도 직감이나 통찰이 아닌 소비자 분석에 의존했다. 패션산업의 흐름이 의류에서 액세서리로 옮겨가고 있다는 것도 분석을 통해 알아냈다. 액세서리로의 중심이동을 통해 그는 금융위기의 와중에도 코치를 구해냈다.

습성 변화 못 읽은 LG전자
프랭크포트 회장의 분석 경영이 성공한 이유가 뭘까? 소비자의 습성과 습성 변화는 분석하면 보이기 때문이다. 코치는 매년 5만~8만 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한다. 2010년에도 5만 명을 조사했다. 주로 인터넷을 많이 사용한다. 2010년 6월 6000명의 소비자를 설문해 보니 2년 전보다 소비심리가 나아졌다는 걸 발견했다. 45% 응답자가 미국 경기가 더 나빠질 것으로 보고 있었으나 2년 전엔 이 비율이 87%였다. 이런 변화는 움츠렸던 소비가 되살아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을 보고 새로운 제품을 어떻게 내놓을지를 결정한다.

새로운 습성이 태동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새로운 것이 대세가 될지 아닐지를 데이터로 분석하기 쉽지 않고 변화 여부에 대한 의견이 분분하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이 좋은 예다. 림의 블랙베리라는 스마트폰은 소비자의 새로운 습성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아이폰은 달랐다. 새로운 생활습성을 만들어 내는 기폭제가 됐다.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기업이 LG전자다. 이유가 있다. LG전자는 미국의 1위 통신사인 버라이즌과 손잡고 북미시장에서 판매 1위의 휴대전화 제조사가 됐다. 문제는 버라이즌이 스마트폰에 무심했다는 점이다. 그러다 경쟁사인 AT&T가 애플과 손잡고 아이폰을 내놓자 갑자기 스마트폰 위주로 영업방침을 바꿨다. 통신사업자는 노선 변경이 쉽지만 제조사는 적어도 1년 가까운 시간이 필요하다. LG전자는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만일 버라이즌이 LG전자에 스마트폰에 대한 경각심을 주었다면 LG전자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B2B사업의 경우는 상위 협력사가 세상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평소에 상위 협력사의 성향을 파악해둬야 한다. 세상의 변화에 둔감하게 대응하는 곳이라면 상위 협력사와 무관하게 세상을 보는 눈을 키워 놓아야 한다. 세상 사람이 주목하고 환호하는 것에 대해 일단 눈여겨보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생활습성이 바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다. 징후가 있다. 아이폰은 2007년에 출시된 된 제품이다. 그때 시장에서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아이폰을 사겠다고 사람들이 새벽부터 줄을 섰다. 아이폰이 사람들의 생활습성을 변화시킬 가능성이 이미 예고됐다. 이런 징후를 LG전자가 놓친 것이다.

창조는 사람들의 걱정거리를 덜어주는 방식으로도 가능하며 (문제공간 활용), 이미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해결책을 가져다 씀으로도 가능하다(지식공간 활용). 여기에 더해 사람들의 습성을 이해하면 또 다른 창조의 길을 열 수 있다(습성공간 활용).

이홍 광운대 경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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