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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인자는 없다” 무바라크, 도전세력 가차없이 제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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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1981년 10월 6일 카이로에서 열린 승전기념일 군대 사열 행사에서 호스니 무바라크 당시 부통령(왼쪽)과 무함마드 안와르 사다트 당시 대통령이 군복 차림으로 앉아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직후 사다트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게 암살당했고, 무바라크는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AFP=연합뉴스]


‘호스니 무바라크’.

서정민 교수

 이집트를 30년간 통치해 온 대통령의 이름이다. 이집트어로 ‘호스니(Hosni)’는 ‘최고’를, ‘무바라크(Mubarak)’는 ‘축복받은 사람’을 의미한다. 1928년 나일 삼각주의 미누피야에서 가난한 법무부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난 무바라크는 후에 이름처럼 모든 권력과 부를 차지하며 축복을 누려 왔다.

 무바라크 대통령의 별명은 ‘가무스 다히크(Gamus Dahik)’, 즉 ‘웃는 소’다. 국민이 비밀스럽게 사용하는 은어다. 이집트에서 가장 잘 팔리는 치즈와 우유회사의 로고에 등장하는, 이를 드러낸 채 웃는 젖소와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에서다. “가장 튼튼한 젖소의 초유로 만든 우유와 치즈를 매일 아침 마시고 먹는다”고 일부 국민은 그를 비꼰다.

 신체검사를 꼼꼼히 받는 공군사관학교 출신인 그는 건강을 타고났다. 골격이 큰 데다 이라크전쟁 이후 드러난 사담 후세인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수십 명의 요리사와 의사가 그의 건강을 돌본다. 이집트 서민들은 의사의 진료를 받기 위해 국립병원 복도에서 잠자며 며칠 전부터 기다려야 한다.

 무바라크가 30년간 특별한 저항 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배경은 크게 두 가지다. ‘이데올로기를 앞세우지 않은 정치 스타일’과 ‘물리력의 적극 사용’이었다.

 좌파 사회주의의 극단을 달렸던 52년 혁명의 주동자 가말 압델 나세르 전 대통령, 개방정책과 자본주의를 내세우며 극우로 향했던 안와르 사다트 전 대통령과 달리 무바라크는 중도 노선을 걸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으로 권력을 장악한 육군 출신이 아니었다. 최대한 몸을 낮추고, 이념 색채를 보이지 않으며, 원만하게 국정을 운영했다. ‘공공의 적’이었던 이슬람 과격세력 소탕에만 몰두했다. 미국은 그런 그를 군사·경제 원조로 지원했다.

 무바라크가 국정을 완전히 장악한 건 89년 무함마드 아부 가잘라 국방장관을 해임하면서다. 국민의 신망과 육군의 지지를 한 몸에 받던 그를 집권 8년 만에 제거하면서 무바라크는 1인 독재체제를 굳혔다.

 특히 2인자를 인정하지 않는 그의 통치 스타일은 장기집권을 가능케 한 주요 요소다. 반정부 세력은 물론이고 도전 세력을 대부분 추방하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보냈다. 시위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지만 외국에 머물던 무함마드 엘바라데이 정도가 ‘무바라크 이후’로 거론되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아직까지 이집트에는 몇 개의 수용소에 몇 명의 정치범이 있는지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다. 무바라크는 반정부 세력 용의자를 체포하기 위해 가족을 구금하는 방법까지 동원했다. 정권에 위협이 될 무슬림형제단의 정당 설립 요구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권자 등록은 1년 전에, 유권자 재등록은 경찰서에서, 투표는 보안요원이 있는 공립학교나 경찰서에서…. 2005년 직선제 개헌 전까지 대통령 찬반 투표는 이렇게 진행됐다. 99%의 지지율이 나온 건 당연했다.

 반정부 시위대는 무엇보다 무바라크 가족의 부패와 권력 세습 시도에 분노한다.

 장남 알라는 사업가다. 돈이 되는 이동통신사업, 고가품 수입업, 건설, 방송 등 그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언론법을 개정, 대통령 일가에 대한 취재나 보도를 금지해 알라의 재산이 어느 정도인지도 알려지지 않는다. 차남 가말은 집권 국민민주당의 서열 3위인 정책위원장이다. 이번에 사퇴한 내각은 ‘가말 내각’이라고 불릴 만큼 차남이 인선에 개입했다. 차남의 권력 세습을 위해 헌법을 고치고 대통령 출마 자격을 사실상 집권당 대표로 제한하는 조치까지 취했다. 영부인 수잔은 문화 및 교육사업을 장악하고 있다. 이를 위해 수잔은 최측근인 파루크 호스니 문화장관을 지난 23년 동안 장관직에 머물게 했다. 81년 10월 6일 카이로 근교 나스루에서 열린 ‘이스라엘 10월전쟁 8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사다트 대통령이 이스라엘과 체결한 평화협정(79년)에 불만을 품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암살된 뒤 ‘1인지하 만인지상’인 부통령 자리에서 대통령 자리에 오른 무바라크. 그는 지금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오랫동안 친구였던 미국조차 더 이상 우호적이지 않다. 위기의 징후는 있었다. 2004년 차남 가말의 권력이양설이 제기되면서 일어난 키파야(Kifaya·이제 그만 충분해!) 운동이 그것이었다. 하지만 경고에 귀를 닫은 그의 과욕은 2011년 초 ‘최고로 축복받은 사람’을 벼랑 가까이로 밀어내고 있다.

 서정민 교수(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중동아프리카학) amirseo@hufs.ac.kr

◆키파야(Kifaya)=키파야는 아랍어로 ‘충분하다’는 뜻으로 “30년 장기 집권으로 충분하니 더 이상은 안 된다”는 의미의 시위 구호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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