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제역에 … 휴가군인도 집에 못 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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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가장 친한 친구 딸의 혼례에도 못 가다니. 대체 구제역이 뭔지….”

 전북 완주군 화산면 나복마을에 사는 농민 이문성(52)씨는 “안타깝다”며 혀를 찼다. 이 마을 출신으로 몇 년 전 서울로 나간 친구의 딸이 22일 서울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신랑의 부모 역시 바로 옆 동네인 마전 출신이었다. 보통 때라면 두 마을 주민들은 전세버스를 대절해 결혼식장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아무도 참석하지 못했다.

 화산면 주민 30~40%가 한우 1만3000여 마리를 키운다. 이미 구제역이 발생한 충남과 인접한 접경지역이다. 이 때문에 주민들은 혹시라도 바이러스가 묻어 올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다. 나복마을은 10여 일 전 마을 진입로에 쇠사슬까지 둘러쳤다. 외부인들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28가구 50여 명의 주민은 스스로 마을에 갇혀 있기로 했다. 주변 4~5개 마을도 비슷한 상황이다.

 지난해 11월 28일 경북 안동에서 구제역이 처음 발견된 이후 우리 농촌의 생활 모습이 확 바뀌고 있다. 구제역이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농촌은 바다에 갇힌 외딴 섬처럼 외부와 고립되어 가고 있다. 예년 같으면 12~1월은 농민들에게 가장 한가한 때다. 주민들끼리 온천·사우나를 찾아 1년간 쌓인 피로를 푸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올겨울은 모든 행사가 ‘올스톱’이다.

 충남 홍성군 금마면 가야마을 주민들은 도로에 철제문을 세우고 마을 안에 있던 차들도 철제문 밖으로 옮겼다. 외부로 나가지 말자는 의지의 표현이다. 생필품은 소독한 경운기로 일단 마을회관까지 옮긴 뒤 재차 소독하고 개별 농가로 전달한다. 가족들과 생이별한 경우도 적지 않다. 한우 70마리를 키우는 박진규(40·충북 제천시)씨는 가족들을 제천 시내 집에 두고 30㎞ 떨어진 축사에서 한 달째 혼자 지내고 있다. 충북 진천군 이월면 이곡마을 주민들은 방학을 맞은 학생들도 마을로 들이지 않고 있다. 주민 이병화(52)씨는 군에서 휴가를 나온 아들마저 집에 오지 못하게 했을 정도다.

 구제역은 일주일여 앞으로 다가온 설 명절의 풍속도마저 바꿀 기세다. 설 명절 때면 볼 수 있었던 ‘민족의 대이동’도 올해엔 예년 같지 않을 전망이다. 농민들 스스로 자식들에게 고향에 오지 말도록 권유하고 있고, 지방자치단체도 귀향 자제를 호소하기 있기 때문이다. 경북 김천시는 지난 12일 설 명절에 고향 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편지를 전체 주민들에게 보냈다. 박보생 김천시장은 편지에서 “시민들은 되도록 현 거주지에서 명절을 보내고, 외지에 있는 가족들에게 귀향을 하지 말도록 당부해 달라”고 밝혔다. 전북도와 전남도 역시 “구제역은 눈에 보이지 않는 유령 같은 바이러스로 순식간에 감염될 수 있다”며 “구제역 바이러스가 사라질 때까지 고향 방문을 자제해 달라”는 호소문을 지역 향우회에 보냈다.

전주·홍성=장대석·신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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