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이슈 진단

북한에 가장 매력적 선물은 명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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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워싱턴에서 열린 미·중 정상회담이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된 것은 우리로서도 매우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만약 그 회담에서 양국 간의 입장 차이가 더욱 커지고 긴장 고조의 조짐이 보였다면 지난 몇 달 전운이 감도는 긴박함을 경험했던 우리들에게는 걱정이 더해지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정상회담은 잘되면 잘된 대로, 안 되면 안 되어서, 나름대로 어려운 과제를 우리에게 넘겨주게 된다. 한반도 및 동북아의 안정은 물론 지구촌 전체의 공존공영에 역행하며 궤도이탈을 반복하고 있는 북한을 하루속히 국제사회의 대화와 협력의 틀로 유도하자는 미·중 합의는 시의적절하지만, 과연 어떻게 이를 성사시킬 수 있느냐 하는 구체적인 방도에 대한 논의는 불투명하다. 결국 새로운 활로와 전략을 제시할 일차적 책임은 당사자인 한국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분단의 비운이 수반하는 숙명적인 부담이기에 우리의 진로를 가다듬고 주저 없이 전방위 외교의 전략으로 나서야 되겠다.

 역사의 흐름에도 가속도가 붙는지 100년에 한 번쯤 오던 세계적 세력균형의 전환이 이제는 20년이면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베를린장벽의 붕괴로 동서냉전이 끝난 지 20년 만에 리먼(Lehman)투자은행의 파산이 도화선이 된 금융시장의 대란으로 미국의 유일 초강대국시대가 급속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08년 이후의 중국은 이러한 세력균형의 전환을 확신하고 수동적 자세로 인내하던 안보정책으로부터 능동적 공세로 강한 추진력을 보이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G2시대의 개막을 선언한 셈이 되었다. 그렇듯 새 시대의 주역을 자처하는 미국과 중국이 과연 시급한 해결책을 기다리는 당면과제, 즉 한반도의 북한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함께 시험대에 올라가 있다.

 총 41개 항의 미·중 정상회담 공동성명 가운데서 19항이 G2의 유효성 여부를 가늠하는 북한 핵문제에 대한 공동 대처방안이다. 북한이 핵무기를 파기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재가입해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사찰을 받아들이겠다는 2005년 9·19 공동성명과 이와 관련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의 중요성을, 그리고 이러한 비핵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이고 효과적인 조치가 필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한 미·중 양국의 긴밀한 협력도 중요하지만 진실되고 건설적인 남북대화와 남북관계의 개선은 필수적임을 명기하고 있다. 문제해결의 핵심적 책임을 남북한에 넘기면서, 남과 북이 각기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뒤얽힌 미·중 관계와 남북관계의 현상을 타파할 수 있는 주도권을 어느 쪽이 갖게 되는가를 결정하는 함수관계를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함수관계를 풀어가는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한편으로 미·중·러·일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주류가 북한에 대한 공동의 압력을 행사하고 동시에 북한이 이 압력에 응할 수 있도록 적절한 보상 또는 당근을 제시하는 효과적 전략과 시나리오를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라 하겠다. 이 경우 가장 매력적인 선물 또는 당근은 물질적인 것보다도 북한 주민이 수용할 수 있는 명분임을 명심해야 한다. 북한 정권엔 남북 간이든 6자회담이든 그들이 당당히 수용할 수 있는 명분에 성패를 걸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북한이 비핵화 목표 달성과 9·19 공동성명의 약속을 전면 이행하기 위해서는 어떤 명분이 필요할까.

 20년 전 1991~92년에 이룩한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공동선언’은 남북의 합작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이를 자주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김일성 주석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며 남북 간에, 그리고 6자회담에서 구체적 이행계획을 확정하고 실천하겠다고 북한이 입장을 정리한다면 이는 긍정적 진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내년 2012년은 김일성 출생 100주년으로 이른바 ‘강성대국’ 건설을 완료하겠다는 북한으로서는 대단한 명분을 마련하는 동시에 낙후된 경제의 고도성장을 포함한 다양한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기회라고 하겠다. 만약 북한이 이러한 명분으로 비핵화와 개방에 합의한다면, 그리고 평화협정을 포함한 포괄적 협상에 응한다면, 중국을 비롯한 모든 당사국이 이를 환영하고 협조하며 이행과 실천을 함께 보장하는 데 적극 참여할 것으로 예상된다.

 원래 통일과 같은 민족의 큰 목표를 향한 여정은 멀고 험난한 것이다. 떠들수록 오던 복도 날아간다고 한다. 조용히, 그러나 치밀하게 우리의 다자외교와 남북대화의 전략을 가다듬고 강력히 추진해 나가야 한다. 미국과 중국도 이러한 우리의 노력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홍구 전 총리·중앙일보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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