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은행과 은밀한 거래 ‘어산지 입’에 2000명이 떤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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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스위스 은행에 돈을 숨긴 전 세계 정치인과 부자들이 폭로 전문 사이트 위키리크스의 설립자 줄리안 어산지(Julian Assange·사진)의 입에 주목하고 있다. 어산지가 “스위스계 율리우스 배르 은행에 있는 2000명의 비밀계좌를 조만간 공개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 은행은 부유층 자산관리에 강점이 있다. 아시아·미국·유럽의 정치인 40명 정도와 전 세계 부자·다국적 기업·금융기관들이 탈세 목적으로 이들 계좌에 돈을 숨겼다고 영국 일간 가디언의 일요판 신문인 업저버가 16일(현지시간) 전했다. 한국인들의 비밀계좌도 폭로될지 주목된다.

 어산지는 17일 위키리크스 영국 본부가 있는 런던 프런트라인 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이때 율리우스 배르 은행의 내부 고발자 루돌프 엘머(Rudolf Elmer)는 콤팩트 디스크(CD) 두 장을 어산지에게 건넸다. CD엔 세금을 회피하기 위해 율리우스 배르 은행에 비밀계좌를 만든 2000명의 명단과 예금액이 담겨 있다고 엘머는 밝혔다. 엘머는 8년간 카리브해의 조세피난처인 케이먼군도에서 율리우스 배르 은행 지점장을 지낸 뒤 2002년 해고됐다. 그는 2007년에도 위키리크스에 부유층의 탈세 정보를 건넨 적이 있으며 당시 일부 국가는 폭로된 인사에 대해 세무조사를 벌였다. 이 때문에 엘머는 스위스 은행비밀법을 위반한 혐의로 기소돼 19일 법정에 출두한다.

 어산지는 기자회견에서 “CD에 담긴 비밀계좌 정보를 위키리크스 사이트에 모두 공개할 예정이나 수주 정도가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엘머는 “비밀계좌 정보를 공개하지 않고 침묵하는 대가로 돈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기도 했다”며 “페에르 슈타인브뤽 전 독일 재무장관에게 아무 대가 없이 정보를 넘기겠다고 제의했지만 응답이 없었다”고 소개했다. 이어 “나는 (은행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시스템에 반대한다. 우리 사회를 파괴하는 이 시스템에 대해 사회도 알기를 원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영국·프랑스·터키 등은 해외 은닉자산 사냥에 열을 올리고 있다. 경제 부진으로 세수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수단이 되는데다 국민들도 지지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2009년 스위스 최대 은행인 UBS에서 4450명의 비밀계좌 명단을 건네 받았다. 당시 1만4700명이 비밀계좌를 자진 신고했고 수십억 달러의 세금을 거둘 수 있었다. 영국과 프랑스도 2009년 비밀계좌에 대한 자진 신고를 받아 각각 5억 파운드(당시 약 9000억원)와 5억 유로(당시 약 8000억원) 이상의 세수를 확보했다. 어산지는 스웨덴 검찰로부터 성폭행 혐의로 기소돼 영국에서 체포된 뒤 지난해 12월 16일 보석으로 풀려났으며 현재 지지자의 집에 머물고 있다.

정재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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