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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취재] 한해 38조 쓰는 시·군·구 예산감시 '결산제도'허술

중앙일보

입력

94년부터 기초의회의 결산검사위원으로 일하며 제주도 한 군청의 예산집행이 잘 됐는지를 점검했던 金모 회계사는 결산제도의 한계를 절감한다.

그의 고백. "매년 예산을 과다책정해 예산불용(不用)액이 10%선에 달했다. 한정된 예산을 어느 한 부문에 과다책정하면 정작 꼭 필요한 사업에 돈을 쓸 수 없어 예산집행이 비효율적으로 흐른다. 이런 문제점을 매년 지적하지만 시정되지 않았다. 매번 이런 식으로 예산이 책정되고 기초의회는 결산심의과정에서 비효율적 예산집행을 그대로 승인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다. "

그는 "심지어 군수가 공약성 사업을 벌이면서 부채차입을 많이 해 부채를 좀 줄여야 한다고 지적했더니 그런 것은 결산검사 의견서에 내지 말라는 공무원들의 압력까지 받았다" 며 "결산제도가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집행에 대해 면죄부를 주는 역할밖에 못하고 있다" 고 말했다. 기초자치단체가 예산을 제대로 사용했는지를 감시.감독하는 '결산제도' 가 부실하다.

국내 2백32개 기초자치단체가 지난해 사용한 예산은 38조원. 하지만 이 돈의 사용처를 점검하는 결산과정이 워낙 허술해 시민의 '혈세(血稅)' 인 예산의 누수나 낭비를 제대로 찾아내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

기초단체는 결산보고서를 적당히 작성하고, 이를 1차적으로 점검하는 결산검사도 허술하다. 또 기초의회는 예산집행에 문제가 있어도 결산서를 결산심의과정에서 슬그머니 통과시키기도 한다. 그 결과 지자체의 예산 전용(轉用), 엉터리 결산서 작성 등 심각한 부작용까지 나타나고 있다.

예산 전문가들은 "중앙정부는 감사원이 결산서를 검토하고, 광역지자체는 결산전문위원이라도 두어 체계적인 결산심의를 하지만 기초단체는 이런 여과장치가 없어 결산과정이 허술하게 진행된다" 고 지적한다.

기초단체가 예산집행을 제대로 했는지를 검토하는 첫 단계는 결산검사다. 기초단체가 작성한 결산보고서를 기초의회 의원(대표검사위원)과 공인회계사.전직 공무원 등 3~5명으로 구성된 결산검사위원회가 점검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공무원들이 검사위원들이 필요로 하는 자료제출을 거부하거나 심지어 민감한 부분은 결산검사 의견서에 담지 말라는 압력까지 가하는 경우도 있다. 지방자치법상 기초의회는 결산승인권만 가지고 있을 뿐 결산이 잘못됐다고 해서 자치단체장에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제도상의 허점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검사작업을 형식적으로 대충하게 된다" 는 것이 결산작업에 참여한 검사위원들의 지적이다.

설령 결산과정에서 문제점을 지적하더라도 시정도 잘 안된다. 대표적인 것이 업무추진비를 엉뚱하게 사용하는 경우다. 서울시 한 구청의 결산보고서를 3년째 검사했던 千모 회계사는 "연간 30억원에 달하는 업무추진비 문제를 매년 결산평가 보고서에서 지적했다. 업무추진비가 대부분 회식비로 사용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번도 시정되지 않은 채 다음에도 역시 같은 식으로 업무추진비를 회식비로 사용하고 있었다" 고 말했다.

국회 법제예산실 신해룡(辛海龍)예산정책심의관은 "그러다 보니 결산제도가 예산집행의 문제점을 지적, 다음해 예산편성을 효율적으로 하자는 본래의 의미가 퇴색된 채 지자체의 예산집행을 단순히 승인해주는 요식행위로 변질되고 있다" 고 말했다.

기획취재팀〓하지윤.왕희수.양선희.나현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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