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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다석·씨알·김지하에서 생명을 읽다, 한국 발‘문사철’첫걸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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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글로벌 생명학
이기상 지음, 자음과모음
408쪽, 3만원

“한국 발(發) 인문학의 가능성을 타진해보는 시험무대”(402쪽). 책 말미에 저자 스스로 저울질 해놓은 책의 ‘무게’다. 일단 동의한다. 읽고 나니 한국 발 인문학 쪽보다는 시험무대란 말에 방점을 찍어야 할 듯하다. 그래도 어딘가? 연말 독서시장에 등장한 국내학자의 소중한 작업이 분명하다. 인문학이 휘청대는 요즘 인문 시리즈 ‘뉴아카이브 총서’를 기획한 출판사의 용기도 평가할만한데, 이 책은 총서 첫 권이다.

 무엇보다 저자가 이기상(외국어대 철학과) 교수다. 독일 뮌헨 예수회철학대 등에서 하이데거를 전공한 그는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의 초대 회장을 지냈고, 1992년 열암 학술상을 받은 중진. 지식대중을 염두에 둔 책 이 책은 무엇보다 ‘우리 학문의 길’ 개척을 모색하는 작업이다. 예전 국문학자 조동일이 ‘학문의 나그네’ 처지를 청산하자는 문제제기에 대한 화답으로 보인다.

 문제는 방법. 서양학문의 장점이자 단점인 이성 중심주의·인간 중심주의의 틀을 깨자는 것, 그것을 생명학을 통해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서구철학 각주 달기에 몰두해온 강단철학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거나 외면해왔던 20세기 한국인 사상가 셋을 깊숙이 끌어들였다. 다석(多夕) 유영모(1890~1981), 그의 제자 씨알 함석헌(1901~89) 그리고 생존 시인 김지하(1941~ )가 그들인데, 이들은 독자적인 생명사상을 개진해왔다. 다석의 경우 생명을 주제로 글을 남기지 않지만 그의 삶은 “생명이라는 놀음판에 판돈을 걸고 죽기 살기”(150쪽)를 했다. 삶 전체가 생명사상인 경우는 인류사에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그런 다석은 “식사(食事)는 곧 장사(葬事)다”고 말했다. 음식은 생명체이기 때문에 끼니란 우주 생명을 죽이는 일이라는 인식이다. 장례를 줄이자는 생각에서 하루 한 끼만 먹었던 그는 “식사는 곧 제사”라는 말도 했다. 음식물이 피가 되어, 위로 올라가는 향불처럼 생각을 피워 올린다는 뜻이다. 씨알도 하루 한 끼만 했지만, 그의 사상을 관통하는 핵심 역시 생명으로 봐야 한다.

 다석과 씨알을 공부하기 전 저자가 매료됐던 이가 김지하. 책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제일 높다. 해월(海月) 최시형 등의 동학 사상을 토대로 생명사상을 펼쳐온 그의 공헌은 그동안 문학의 범주에서만 다뤄졌다. 하지만 김지하의 생명관은 서구 녹색운동보다 깊고 근본적이다. “그들은 무기물을 생태계로 인정하지만 신령한 생명으로까지 보지 못한다.”(274쪽) 서구가 생태계 존중에서 그치지만, 김지하는 우주 뭇 생명에 대한 모심(공경)까지 요청한다.

 생명관에 토대를 둔 새로운 영성(靈性), 여기에서 나오는 영성의 정치에 어떻게 도달할 것인가. 그걸 묻는 게 『글로벌 생명학』의 핵심이다. ‘동서 통합을 위한 생명담론’이란 부제를 단 책의 글도 평이하다. 단군 신화나 한국인의 일상에 스며든 생명관까지 포괄하는 이 책에서 아쉬운 건 나열주의가 아닐까 싶다. 화학적 결합 속에 체계를 이루기보다는 이모저모를 알리는 단순 소개에 그친 인상이어서다. 중요한 건 이 책으로 한국 발 문사철(文史哲) 탄생의 깃발을 올렸다는 점이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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