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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60년] 대구에서 품은 강군의 꿈 (237) 양보 못 할 포병장교 육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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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은 1951년 봄에 대공세를 펼치면서 수도 서울을 다시 노렸던 중공군 대병력을 향해 중앙청 앞에서 마포까지 대포 400문을 배치한 뒤 강력한 반격을 펼쳐 물리쳤다. 사진은 당시의 중앙청 앞 포격 장면이다. 그때의 국군은 강력한 포병을 육성하는 게 절박한 과제였다. [중앙포토]


당시의 최대 현안은 국군의 실력을 키우는 작업이었다. 양적으로는 국군의 사단 숫자를 10개에서 20개로 늘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무기체계와 장비를 제대로 갖춰야 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그러나 사단 수만 늘린다고 국군의 전투력이 높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질적으로 국군의 실력을 증강하려면 반드시 포병을 양성해야 했다. 포병 양성과 집중 훈련은 1952년 내가 강원도 소토고미의 국군 2군단장 시절에 제임스 밴플리트 장군의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이미 시작한 상태였다.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사단에 속한 포병의 지휘관 계급이 너무 낮다는 점이었다. 사단장은 소장이나 준장이 맡고 있었으나 그 예하의 포병 지휘관 계급은 대개가 중령급이었다. 현대전에 반드시 필요한 포병에 관한 이해가 당시로서는 매우 부족했다. 그런 이유로 국군 사단장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포병을 잘못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부 사단장이 포병 지휘관을 불러 “여기서 쏴라” “부대에 가까운 곳으로 와서 사격하라”는 식의 지시를 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해진 포 진지에서 사각(射角) 조정 등을 통해 발사 거리와 좌표를 조정할 수 있는 포병의 사격 원리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었다. 어떤 포병 지휘관은 그런 지시에 “부대에 가까운 곳에 가지 않고 포 진지에서도 얼마든지 사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가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사단에 1개 대대씩 배치한 포병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는 일도 벌어졌다. 따라서 사단에 포병을 증강 배치하면서 그 지휘관의 계급을 올리는 일이 중요했다. 포병 지휘관이 최소한 부사단장과 맞먹을 수 있을 정도의 계급을 지니고 있어야 사단장과 의사소통을 제대로 하면서 업무를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육군참모총장 자리에 오른 뒤인 52년 가을 어느 날 당시 육본 행정참모부장이었던 신응균 소장(육군 중장 예편, 서독대사 역임)으로부터 그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그는 당시 국군 포병 부대의 운용 상황 등을 설명하면서 위에 적은 문제점을 내게 설명했다. 신 소장은 그 대안으로 보병의 부사단장급 대령들 가운데 우수한 사람을 선발해 일정 기간 포병 교육을 시킨 다음에 포병 지휘관으로 전과(轉科)를 시키자고 건의했다. 마침 밴플리트 장군의 결정에 따라 국군 포병 17개 대대를 증강하는 작업이 바쁘게 이뤄지고 있던 시점이었다. 장거리 포 사격이 받쳐 주는 든든한 화력(火力)이 없어 적과의 싸움에서 늘 허약한 모습을 보였던 국군이었다. 따라서 포병을 발 빠르게 증강해 화력 면에서 적에게 밀리지 않는 군대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포병의 양적 증가와 그를 제대로 이끄는 전문 포병 장교의 양성이 시급했다.

 나는 신응균 소장의 보고를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그 상황에서는 매우 시의적절한 보고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병과 포병의 보포(步砲) 협동 작전을 원활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그 보고서를 재가(裁可)했다. 미군도 사단에 준장 계급의 포병사령관을 두고 있었다. 부사단장과 같은 계급의 포병사령관을 두고 보포 협동작전을 마찰 없이 수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신응균 소장의 보고 내용에 따라 보병 병과의 대령 16명과 중령급 장교까지 포함해 30명을 선발, 광주의 포병학교에 입교시켰다. 52년 10월께였다.

 그들은 이듬해인 53년 1월 예정된 9주 동안의 교육을 마쳤다. 나는 소토고미에 있던 미 5포병단의 리처드 메이요 장군에게 부탁해 이들이 현장실습 교육까지 마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그 상황에서 문제가 터졌다. 나름대로 꼼꼼한 교육과정을 거쳐 이들을 포병 지휘관으로 육성한 뒤 준장으로 진급시켜 일선 부대에 배치하려 했던 내 계획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신임 미 8군 사령관으로 막 부임한 맥스웰 테일러 장군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부임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상의할 일이 있으니 만나자”는 전갈이었다. 나는 서울의 동숭동 미8군 사령부로 그를 찾아갔다. 그는 사무실에 들어선 내게 “백 장군, 아무래도 한국군 포병 지휘관의 장성 진급 계획을 없던 것으로 해야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서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그 또한 포병 출신이었다. 그는 “포병은 지금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것처럼 단기간에 양성할 수 없다. 포병은 평생을 두고 배워도 완전히 배우지 못하는 특수한 병과다. 따라서 지금 추진 중인 포병 지휘관 단기 양성은 포기하는 게 좋다”는 취지로 내게 말을 했다.

 그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철저한 준비’를 자신의 지휘 철학으로 내세우고 있는 미군 장성으로서는 당연한 논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당시 상황은 절박했다. 단기간에 포병 지휘관을 키워내지 않으면 늘 전선에서 밀리는 운명을 맞아야 할 국군이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런 계획에 제동을 건 미 8군의 뒤에는 한국군 포병장교들의 입김이 있었다. 그들은 보병의 우수한 지휘관들이 포병으로 전과하면서 진급할 경우 자신들의 입지(立地)가 좁아질 것을 우려해 미 8군 포병부장에게 문제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새로 부임한 미 8군 사령관에게 한국군 인사는 대한민국 육군참모총장의 고유한 권한이라는 뜻을 완곡하게 설명했다. 그를 정면으로 통박한 것은 아니었으나, 부드럽지만 강하게 그 점을 말했다. 이어 나는 “선발한 장교들은 한결같이 우수한 사람들이니, 한번 면담이라도 해 본 뒤에 결정을 하자”고 말했다.

 타협안을 내민 셈이었다. 테일러 장군도 생각을 해보는 눈치였다. 마침 그는 당시에 매우 바쁜 일정을 소화해야 했다. 그는 결국 동석했던 미 군사고문단장 라이언 소장을 바라보면서 “나 대신에 백 장군과 함께 면담을 한 뒤 그 결과를 보고해 달라”고 말했다.

정리=유광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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