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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대변인을 두냐고요? 대선 조기붐을 염려해서죠”

중앙선데이

입력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한나라당 이정현(52·비례대표·사진) 의원은 ‘박근혜의 입’으로 통한다. 대선후보 지지도 1위를 달리는 박근혜 전 대표의 대변인‘격’으로 현안에 대한 공식 대응을 도맡고 있다. 그러나 그가 호남 출신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초선 의원으로 국회 예결위원을 3년 연속 맡아 호남의 각종 숙원사업을 꼼꼼히 챙겨 ‘호남 예산 지킴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자타 공인 박 전 대표의 심복으로 언론의 관심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좀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그를 만나 박 전 대표와 호남에 대한 속얘기를 들어봤다.

‘호남 포기’ 포기하라, 박근혜에 간청
-박 전 대표와의 첫 인연은.
“2004년 총선 때 광주에 출마하자 연로하신 아버님이 저를 만류하기 위해 이틀간 단식투쟁을 하셨다. 겨우 설득해서 선거에 뛰어들었는데 중앙당에선 격려전화 한 통 오질 않더라. 그러던 어느날 당시 박 대표가 전화를 걸어왔다. 천막당사 시절 5분 간격으로 (후보들이) 서로 모셔가던 때였다. 박 대표가 ‘그 어려운 지역에 가서 한나라당의 맥을 잇고 계시는데 가보지도 못하고 정말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제가 어떻게든 한번 가보도록 할게요’라고 하더라. 그때 생전 처음 박 대표와 얘길 나눴다.”

-그 후 박 대표가 광주에 갔나.
“선거 전날 오후 또 전화가 왔다. ‘어떻게든 가보려고 했는데 너무 오라는 곳이 많아 갈 수가 없네요. 죄송합니다. 선거 끝나고 제가 밥 한번 사겠습니다’. 난 정치인이 밥 산다는 건 믿질 않기 때문에 기대도 안 했다. 그런데 총선 끝나고 얼마 뒤 대표실에서 전화가 왔다. 점심 약속을 잡자는 거였다. 나가 보니 박 대표가 당5역을 모두 데리고 나왔다. ‘한 말씀 하세요’라고 하더라. 그때 속으로 생각했다. 이때 아니면 언제 또 박 대표와 마주하겠나. 하고 싶었던 말이나 다 털어놓자며 얘길 꺼냈다. ‘대표님, 소원이 하나 있습니다. 대표님이 이끌게 될 한나라당의 호남 포기전략을 포기해 주십시오. 한나라당이 진정 집권을 생각하고 전국 정당을 원한다면 호남도 대한민국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포용해 주십시오’. 15분간 일방적으로 얘기했다.”

-반응이 어땠나.
“내 얘기를 유심히 듣던 박 대표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 발언을 마치자 당5역 모두 굳은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는데 유일하게 박 대표만 ‘아니, 어쩜 그렇게 말씀을 잘하세요’라며 환하게 웃더라. 며칠 뒤 당에서 수석부대변인을 맡아달라고 했다. 박 대표의 대변자 역할을 맡게 된 시작이었다.”

김문수의 경기부지사 제안 거절하기도
-박근혜 대선후보 대변인까지 됐는데 비결이 뭔가.
“한 신문을 네 번씩 봤다. 가판과 본판을 보고, 토요일엔 중요한 기사를 직접 손으로 기록했다. 일요일엔 그걸 타이핑하며 머리에 차곡차곡 쟁여놓았다. 그러다 보니 어떤 상황에 처해도 가장 순발력 있다는 평가를 받을 수 있었다. 김영삼(YS)·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야당 시절 어떻게 했는지도 다 검색해 대여전략을 짰다. 그러던 중 박 전 대표가 대표를 그만둔 직후인 2006년 7월 초 저를 따로 불렀다. ‘9월께 작은 사무실을 내려고 하는데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그날로 당에 사표를 내고 두 달간 실업자로 지내다 9월에 캠프 대변인으로 들어갔다.”

-경선에서 졌는데, 다른 길을 찾진 않았나.
“경선이 끝나고 네 번이나 대선 선대위에 들어와달라고 했지만 모두 거절했다. 김문수 경기도지사 측에서 정무부지사 제안을 해왔을 땐 정말 힘들었다. 솔직히 떨렸다. 봉급다운 봉급을 받아본 적이 없는 나에겐 그야말로 매력덩어리였다. 그때 전화기를 잡고 기도를 했다. ‘하나님, 나 좀 말려주십시오. 전화 끊기 전에 거절 못하면 박 전 대표와는 영영 헤어져야 합니다’. 끝내 거절했다. 다음 날 김 지사에게 불려가 엄청 혼났다. 얼마 뒤 박 전 대표에게서 전화가 왔다. ‘힘드신데 그냥 가시지 그랬어요’. 그러곤 평소 거의 쓰지 않는 표현을 하셨다. ‘제가 잊지 않겠습니다’.”

-박 전 대표의 어떤 점에 끌렸나.
“그의 바른 정치, 정도 정치에 대한 신념이 옳다고 생각했다. 그 방식으로 국정을 이끌면 대한민국이 선진국 문턱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 최우선 전제조건은 국민화합이고, 그 시발이 호남 끌어안기라고 봤다. 박 전 대표는 당 대표 시절부터 이를 몸소 실천했다. 국회의원 전원을 이끌고 섬진강에 발을 담그고 2박3일간 연찬회를 했다. 지명직 최고위원에 호남 출신을 임명한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DJ 고향인 신안은 다섯 번이나 방문했다. DJ도 생전에 ‘현직 정치인 중 동서화합을 이룰 최적임자는 박 전 대표뿐’이라고 하지 않았나.”

-평의원인 박 전 대표가 동료 의원을 대변인 ‘격’으로 두고 있는 데 대해 비판의 목소리도 나온다. YS나 DJ의 계보정치를 답습하는 것 아니냐, 선진화를 외치면서 한편으론 정치권에서 유일하게 계파를 유지하는 게 모순 아니냐는 지적도 적잖다.
“박 전 대표는 오히려 계보정치는 청산해야 할 구태정치라고 생각한다. 경선 이후 단 한번도 소위 친박 의원들을 다 모아 사무실을 내거나 집단행동을 한 적이 없다. 기자들이 다 안다. 대변인 ‘격’을 두는 것도 본인이 직접 나서면 그 순간 다른 예비주자들도 목소리를 높이면서 대선 조기 붐이 일어날 걸 염려해서다. 박 전 대표인들 자신을 부각시키고 싶지 않겠는가. 높은 지지율을 얼마나 만들고 싶겠는가. 한번 실패했는데 왜 조급함은 없겠는가. (한숨을 내쉬며) 어떨 땐 측근인 나도 솔직히 화가 난다. 그럼에도 국가와 현 정부를 위해 자기 이익과 정치적 계산은 철저히 접어두고 있는 거다. 대신 내가 최소한의 대표 동향과 견해를 전달하고 있는 거고.”

-한나라당 의원으로 유독 호남을 챙기는데.
“전남 곡성에서 태어났고 부모님은 지금도 그 집에 살고 계신다. 저는 국회에서의 모든 발언을 ‘호남 출신 한나라당 비례대표 이정현입니다’라고 시작한다. 집권당은 전국 정당을 지향해야 하는데 호남 출신이 드물어 호남의 목소리가 거의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의무감과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고 있다. 제가 정치를 하는 가장 큰 이유다.”
호남도 이제 수지맞는 정치 해야

-어렸을 적 고향 생활은 어땠나.
“7살 때 농사짓는 아버지에게 일기를 배웠다. 하루도 안 빼고 일기 점검을 하셨다. 어린 나이에 한 장을 다 쓰려면 무척 힘들었다. 머리를 쥐어짜면서 써갔던 게 나중엔 큰 힘이 됐다. 초등학교 때는 놀다가도 해거름엔 반드시 마루에 앉아 온 마을이 떠나가도록 국어책을 읽도록 했다. 남 앞에서 또렷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습관이 중요하다고 하셨다.”

-정치의 길이 순탄하지만은 못했다.
“제 삶은 늘 비주류 인생이었다. 호남에, 산골 중의 산골에, 가정형편도 넉넉지 못했고, 고교(광주 살레시오고)와 대학(동국대)도 1차에 합격해본 적이 없다. 서울에서 대학 다닐 때는 고모·삼촌 식구랑 8명이 방 한 칸에서 지냈다. 한나라당도 공채 출신이 아니었다. 집권여당이 돼서 좀 풀리려나 했더니 또 박근혜 비주류다(웃음). 하지만 이게 내겐 큰 에너지가 됐다. 호남·장애인 등 소외계층 챙기기에 앞장설 수 있었던 것도 이런 경험 때문이었다. 제 홈페이지에도 ‘실패한 사람을 위로하는 정치를 하겠다’고 적혀 있다. 저는 국민의 98%가 비주류라고 생각한다. 그들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게 오히려 행운이고 감사할 일 아니겠나.”

-박 전 대표 등 주변에서는 다음 총선에서 호남 출마를 말리며 수도권이나 비례대표를 권유한다던데.
“대변인 ‘격’이라면 2012년 대선 때 박 전 대표를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국회의원직을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다. 배지를 단 것과 달지 않은 건 하늘과 땅 차이라며. 하지만 예산철마다 호남에서 올라온 관료들에게 내 의원회관 사무실을 맘대로 쓰도록 하고, 30분 행사를 위해 3시간씩 왕복을 마다하지 않는 건 내 가슴속에 호남의 피가 끓어오르기 때문이다. 수도권으로 옮기거나 비례대표를 더 해도 지금처럼 혼신의 힘을 다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 답이 절로 나온다. 다음에도 무조건 광주에서 출마할 거다. 호남도 이제 수지맞는 정치를 해야 한다. 강원도나 경남도 바뀌었는데 민주화의 성지라고 자부하는 호남에서 1당 독점체제를 지속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 아닌가.”

박신홍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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